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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고겡의 화혼이 거니는 환각|김찬삼여행기 타이티서 제6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타이티섬은 1년에 몇만명의 세계 관광객이 모여드는 관광지로서 서울 파피테엔 멋진 자동차들이 쏘다니고 상가엔 여러나라 상품이 즐비하여 문명도시답지만 주요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에만 가도 옛날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야자나무나 반다나스의 잎으로 이엉을 한 오막살이 집에서 빵나무의 열매·바나나 또는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며 한가롭게 살고 있다. 어른들은 커누(통나무배)를 만들고 어린이들은 고기를 잡아넣는 종다래끼나 낚싯대를 만든다. 이 섬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자연조건으로 사냥보다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데 아직도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흡사 고겡의 그림속에 나오는 듯한 시골 정경을 보노라니 어디선가 70년전에 이곳에서 숨진 고겡이 나타난 것만 같다. 집들의 둘레에는 히비스카스를 비롯한 가지가지 꽃들이 어울려 피어있고 야자나무에서는 이름모를 작은 새들이 연가를 읊조리고 있다. 꽃과 새의 노래가 어울린 이 회화와 음악의 이중주! 이런 낙원을 아랫도리만 천으로 걸친 반나체의 타이티 여성들이 거닌다.
고스란히 고겡의 그 많은 그림속의 여인의 모습과도 같으며 걸친 옷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고겡의 황홀해 하던 그때의 미인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이리라.
고겡이 모델로 했던 많은 여성들은 이젠 인생을 하직했을테니 찾을 길이 없겠지만 그가 그렸던 그 많은 장소가 어디일까하고 알아보았으나 그나마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이즐을 세웠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서서 고겡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감상에 잠기다가 나는 고겡의 그림대신에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감히 고겡의 그림에 따를수 없지만 내딴은 이 위대한 비가의 넋이 깃들인 타이티의 풍경을 붙들려고 애써 보았다. 언젠가 북한상공에서 공중전하던 비행사가 찍은 사진에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것처럼 고겡의 얼굴이 내가 찍은 필름에 나타나기를 목마르게 바랐다.
서구문명의 몰락을 부르짖는 19세기 말엽은 타이티섬에선 포마레왕조가 망하려고 할 때였다. 이런 때 화단의 기재라고 불리던 고겡은 프랑스정부의 문화사가로서 여기왔었다. 이때는 19세기 후반이후 서구의 역사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쇼펜하워는 인도철학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고,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속죄를 위하여 유럽을 떠났고, 라프카디오·한은 유럽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겡도 이때 서구를 탈출하여 이 타이티섬으로 온 것이 아닌가.
이런 역사의식을 지녔던 그를 받들었기 때문에 이 타이티섬에 와서 느낀 감회는 그지없이 컸다. 그의 체취를 좀더 느껴 보려고 그가 왔을 때의 이 섬의 풍경이며 인정들을 자숙전식으로 쓴 것도 들추어보고 이섬 동남쪽에 있는 그의 박물관도 찾았다. 화랑엔 타이티 여인과 목연을 그린 그림들이 있는데 아쉽게도 복사였으며 진품은 프랑스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고겡의 뜻하지 않은 비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는 그전에 이 타이티에 와서 새로운 미술의 처녀지를 발견하여 수많은 걸작을 낳았다. 이 섬에 홀딱 반하여 아리따운 이 타이티 아가씨와 결혼함으로써 유럽문명에 반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그는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타이티에 돌아와보니 아내는 간데온데 없었다.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사라진 것을 알고 여러 섬을 찾아 헤매어 먼 말케사스제도까지 갔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타이티는 고겡의 새로운 사랑의 땅이면서도 비련의 땅이기도 했다. 이 타이티섬을 소재로한 수많은 그림들은 삶의 기쁨에 찬 것들이지만 그의 생애는 실낙원보다 더 비극적인 실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이 타이티도 그의 영원한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여기서 듣기엔 고겡의 아들인 70세의 에미르란 정신이상자인 늙은이가 타이티에 사는데 외국관광객들에게 사진의 모델 노릇을 하며 걸인생활을 하다시피 한다고 하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위대한 고겡 자신의 말로보다도 그의 후예인 아들이 더 비참한 운명을 지닌 것이 무한한 애수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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