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뭐든지 안 버리는 남편 때문에 속 터진다는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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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Q 중년에 접어든 전업주부입니다. 도무지 뭘 버리지 않는 남편 심리가 궁금합니다. 남편은 대학 때 교재를 비롯해 자기 손길이 닿았던 건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안 쓰는 것 같아 버리면 나중에 알고는 화를 냅니다. 비좁은 아파트에 온갖 물건 다 쌓아놓고 살려니 할 수 없이 저와 아이들 물건은 당장 필요한 게 아니면 다 정리해 버립니다.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 다른 집 중년 가장도 비슷하다더군요. 왜 그런 건가요. 어릴 때 어렵게 살아서 그런 걸까요.

A 중년 남성은 정도 차가 있을 뿐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큽니다. 평균 수명 연장으로 경제적 자원은 더 많이 필요한데 퇴직할 날은 가까워 오고 퇴직 후 새 직장을 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노년 걱정은 나중 문제고 당장 자녀 양육비 대기도 힘겹습니다. 이런 불안감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안하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이겠죠.

 불필요한 물건까지 버리지 못하는 건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더 관계가 깊습니다. 만약 과거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면 불안은 더 크겠죠. 언제고 쓸지 모르는 물건을 버릴 수 없습니다. 미래준비(불안)형 시간관(time perspective)이 작동하는 겁니다.

 

미래가 불안할수록 사람은 강박적이 됩니다. 남 보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특정 생각이나 행동에 집착하는 걸 강박(compulsion)이라 합니다. 강박은 나와 내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완벽주의(perfectionism)와 연관돼 있기 때문에 경쟁 사회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은 걸 봐도 알 수 있죠.

 잘나가는 상사와 일하는 많은 직원이 ‘상사가 나를 믿지 못한다’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일 하나를 시킨 후 수없이 챙기니 ‘나를 못 믿는구나’라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크게 줍니다.

 반대로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현실쾌락적인 시간관(time perspective)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생 뭐 있어, 오늘 즐기면 그만이지’라는 가치관입니다. 현실쾌락적 시간관도 나쁘지 않습니다. 행복한 건 오늘 느끼는 것이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지나치게 현재의 쾌락에만 몰입하는 건 삶을 망가뜨립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런 사람은 스피드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내성이 생겨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에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에 이르기 쉽습니다. 사업할 때 역시 위기 관리보다 게임하듯 무리한 투자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사연 주신 독자분 남편은 이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현재보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남편일까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 아내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남편이 답답할 뿐 아니라 남편 물건을 버릴 수 없어 본인 물건을 버리는 상황입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남편의 꼼꼼함에 아마 아내는 지치다 못해 울화가 쌓여 있을 겁니다.

 마음이 건강하려면 균형이 중요합니다. 미래준비(불안)형 시간관과 현재쾌락형 시간관이 적절히 섞이면 좋은데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가 많습니다. 미래준비형 남편은 도박이나 바람으로 아내를 속상하게 할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부부생활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숨 막혀 못살겠다’며 ‘차라리 바람 피우는 남편이 낫다’는 아내들은 대개 이런 상황일 겁니다.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과도한 미래준비형 시간관은 오늘의 행복을 뺏어갑니다. 미래만 생각하다 보니 삶의 여유가 사라지는 겁니다. 조금만 대충 살면 어떨까요. 인간은 불사조가 아닙니다. 미래만 준비하기에는 인생이 짧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물건에 집착하는 남편을 어떻게 느슨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아내의 잔소리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과음하지 말라’ 같은 당연한 권유에도 남편은 청개구리처럼 반응하며 잘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인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걸 아내가 잔소리 몇 마디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강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박은 불안을 억누르는 자신만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그 의식을 대체할 게 필요합니다. 취미 활동이 대체재로 좋습니다. 취미는 마음의 힐링 활동입니다. 성취를 위한 강박이 아니라 쉼을 위한 이완 활동이고, 미래의 준비가 아닌 현재의 즐거움이니까요.

 딱 보기에도 꼬장꼬장한 강박에 지친 50대 후반 남성이 불면증과 불안증상으로 제 클리닉을 찾았습니다. ‘인생을 대충 살고 싶다’면서도 진료 올 때마다 공책에 자신의 문제를 잔뜩 적어 오더군요. 까먹고 본인의 문제를 다 못 말할까 봐서요. 진료 마치고 나갔다 하나를 못 물었다면서 다시 진료실에 들어온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등산을 취미로 갖게 된 이후로 더 이상 공책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편안한 인상으로 바뀌어 몇 년은 더 젊어 보입니다. 삶에 불안을 주는 스트레스 요소는 변한 게 없는데 현재에서 행복을 찾으니 괴로운 스트레스 요인도 가볍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내 삶의 에너지 중 최소 20%는 노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잘 노는 사람이 대개 더 행복하더군요. 다들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때 취미생활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건 쉽지 않습니다. 나이 들수록 학습 능력이 떨어져 새 취미를 갖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연주신 분, 남편과 공동의 취미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남편이 노는 걸 싫어한다고요. 걱정 마세요. 물건에 대한 집착도 에너지입니다. 다른 곳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경험한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놀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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