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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적치하의 3개월(8)「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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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하의 시련>(5)
북괴가 적치 3개월 동안 가장 역점을 두어 강행한 작업은 인간생활의 물 샐 틈 없는 종횡의 조직이었다.
원래 이「조직」은 공산당 특유의 수범인 동시에 장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남한에서 불과 3개월 동안에 놀랄 만한 「조직작업」을 완수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중삼중의 거미줄 같은 이 「조직」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지하에 숨은 인사들의 고초는 더 가중됐고, 또한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은신 중 적발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그럼, 먼저 북괴가 남한점령지역에서 강행한 「조직작업」을 관계증인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남식씨(전 북괴 충남도당 선전 부책·현 김점곤 교수 안보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위원·47) 『북괴는 남한점령지역에서 전력을 짜내고, 반대세력을 봉쇄하려고 당 및 행정기구를 재빨리 조직했습니다. 그들이 신속하게 소위 「남반부 해방지역」에 정규군의 뒤를 바짝 따라가면서, 조직사업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괴뢰군의 진격에 앞서 남한 각도와 주요 도시에 7∼8명씩 당위원장 및 도 인민위원장급의 당원으로 북에서 신망 있는 자를 뽑아, 미리 남파했기 때문이죠. 북괴는 이런 자들을 먼저 파견해서 국군의 배후에서 지하당원을 규합, 소위 민중봉기를 일으켜 괴뢰군과 「배합작전」을 전개하고, 「해방지역」에서 당을 재건하려고 했어요.

<내무서장은 남파당원이 장악>
나의 경우, 북에서 괴뢰군에 앞서 대전으로 파견됐어요. 충남도당위원장으로 이주상, 충남 도 인민위원장으로 여운철 등이 내정되어 함께 출발했는데 행군「코스」를 잘못 잡아 북괴군과 거의 같은 시각에 대전에 들어갔습니다. 일부의 군 당위원장과, 해안지역에는 면 당위원장까지 북로당원이 내려와서 앉았고, 내무서장은 모두 북에서 특별히 온 자들이예요.
알다시피 각 당 아래 집행기관으로 각급 인민위원회가 있는데 위원장은 그 지방출신 남로당들이 앉았지만, 부위원장이나 서기장 급은 역시 북에서 파견된 자들이 차지하여 실권을 행사했지요.
북괴는 50년 7월 14일자로 소위 「남반부 해방지구의 군·면·리(동)의 인민위원회선거실시에 관하여」라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정령을 발표했어요. 선거 날짜와 실시는 각도의 임시위원회의 재량에 맡겼는데 ,그해 7월 25일부터 9월 13일 사이에 소위 「해방지역」에서 모두 실시됐습니다. 딴 곳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충남의 경우, 남노 당원, 토지분배를 받은 자, 농촌위원회위원, 노력동원에 잘 나가는 열성분자 등으로부터 당원등록을 받아 당을 재건하여 리·면·군 순서로 추천형식의 선거를 해서 「인위」조직을 완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각 급의 당과 인위를 조직하는 한편 당의 외곽단체로 민주청년동맹·여성동맹·직업동맹·농민동맹 등을 조직했죠. 또 토지분배를 하기 위해 농촌위원회라는 것도 만들었구요.
이렇게 되니까 한사람이 보통 두서너 개의 조직 속에 들어가게 되고 하루에 몇 번이고 회의 등을 열어 눈코 뜰 사이 없이 들볶게 됩니다. 더우기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 등을 운반하고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 등을 보수하기 위해 계속되는 노력동원 등으로 조금도 숨쉴 사이를 안 주었지요. 지하에 숨은 요인들 색출은 내무서가 주관해서 주로 민청·여맹원을 동원하여 불시로 가택수색을 했습니다.』
그럼 다시 그들의 이런 「조직」과 요인색출을 용케도 모면한 몇몇 경우를 더 물어 보기로 하겠다.

<"놈들 교화하겠다" 생각도>
▲김상돈씨(전 국회의원·서울 지별 시장·현 장로교 마포구 서교동 교회장로·69)『스스로 생각할 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남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도 없어 설사 공산당이 들어온다 해도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놈들을 한번 교화해봐야겠다 하는 지극히 천진난만한 생각을 한 것이 첫째 잘못이고 수도를 사수하느니 의정부를 탈환했느니 하는 정부방송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둘째 잘못이었지요. 여하튼 나는 27일에도 가족과 함께 태연히 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무위경관인 박군과 오군이 공산당의 잔악성을 설명하면서 피신할 것을 극구 권고해서 집사람과 막내둥이를 데리고 북 아현동에 있는 오학주씨 댁으로 갔지요.
28일 새벽에 뭔가 쾅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이 한강교 폭파인 줄은 모르고 국군이 반격하는가보다 하고 마음을 푹 놓고 잤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졌어요. 괴뢰군이 들어오고 벌써 가택수색이 벌어집데다. 마침 그곳 반장이 아는 사람이라 그 날은 옆집까지만 조사하고 내일 또 온다는 거예요. 그날 밤에 부랴부랴 근처에 있는 유중근씨 댁으로 옮겼지요. 유씨는 같은 교회의 장로에다 내 선거사무장을 지내서 신세를 지게 된 거지요. 오래된 왜식 집인데, 벽장을 열고 천장판자를 두 장 뜯으면 지붕과 판자사이에 기어 다닐만한 공간이 생겨 거기서 90일간 숨게 된 거지요.
깜깜하고 한여름이라 냄새와 먼지가 나고, 쥐들이 부산하게 왕래해서 질식할 것만 같아요. 돈도 없어 매일 호박죽을 먹구요. 그것도 집사람과 아이들이 채소와 냉차장사를 해서 번 거지요. 그러나 그 때만해도 가족이 한데 모여 있어 그런 대로 마음이 놓였지만, 얼마 안 있으니까 그자들이 가족사진을 들고 나를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서 나만 그 댁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가족들 냉차장사로 호박죽>
가족도 떠나고 공포와 지루한 피신생활이 계속되는데, 하루는 4∼5명의 내무서원이 총을 들고 밤 12시에 들이닥쳐요. 김상돈이가 이 집에 있다는데 빨리 내놓으라고 호통을 칩데다. 천장 밑에서 그 소리를 들으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버리고 기도만 드렸습니다.
한두 시간 가까이 집을 뒤지다가 못 잡으니까 유씨의 노부를 위협해요. 그런데 그 노인은 태연히 그런 사람 내 집에 없다고 막 잡아뗍데다. 그래도 놈들이 총대로 천장을 꽝꽝 쑤시는데 정말 오싹합데다.
기침이라도 날까봐 그 삼복 중에 이불을 두세 겹으로 둘러쓰고 엎드려 있자니 보통 고역이 아니예요. 그자들은 한 서너 시간 설치다가 지쳤는지 가 버리더군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3명의 내무서원이 또 왔어요. 이번엔 이치들이 유씨의 조모를 살살 꼬이기 시작해요. 이때 그 할머니는 90고령에다 좀 망령 기까지 있어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분이 내가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혹시 불지나 않을 가 조마조마했지요. 이놈들은 할머니께 자기들이 유 장로의 친구들인데 유 장로를 만났더니 김상돈이가 이 집에 있다고 해서 달려왔으니 빨리 만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천장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다 들립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90노인이 화를 벌컥 내면서 「내 손자는 하나뿐이고 벌써 피난간 지가 오래인데 네놈들이 손자를 만났다고 거짓말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이밖에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요즘도 가끔 꿈에 그때 일이 나타나 끙끙거리며 잠꼬대를 합니다.
이렇게 꼬박 석 달을 햇빛 한번 못 쏘이고 두더지 생활을 하고 나오니까, 얼굴은 하얗게 표백이 되고 수염은 석자나 자라 사람 꼴이 아니예요. 그때 나를 처음 본 대구교합의 외국인 선교사 안두하씨(한국명)가「김 선생, 당신은 백인종이요」하고 놀릴 정도였으니까요.』

<낙오병규합 항전하다 적치에>
한편 상당수의 국군장병들도 적 치하에 낙오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 대표적「케이스」로 수도방위사령관이면서로 후퇴명령을 받지 못해 적 치하에서 숨어살게 된 고 이용문 장군의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 장군은 당시 대령으로 미아리전투를 지휘하다가 낙오되어 남산에서 국군낙오병을 규합, 2일 동안 항전하다가 시내에 잠입하여 은신생활을 했다. 9·28수복 후 이 장군은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불행히도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그러므로 이장군의 적 치하 3개월의 체험담은 미망인 김정자 여사(55)와 장남 이건개씨(현 서울지검검사·31)로부터 들어보기로 하겠다.
『26일 새벽에 채겸덕 참모총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태가 옆에서 같이 들으니까, 서울이 위태로우니 수도방위사령관이 돼 달라는 거예요.
전화가 끝나자 군복을 갈아입고 나갔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장갑차 몇 대를 갖고 미아리전투에 참가했대요. 나는 마침 해산 끝이어서 누워 있었는데 적기가 날아와 기총 소사를 하데요. 그때 집이 육본근처의 군인관사여서 위험한 것 같아 아현동의 친척집으로 3남매를 데리고 피했는데, 28일이 되니까, 공산당세상이 되지 않아요. 그분 소식은 알 길이 없고, 모든 군인의 아내가 그랬듯이, 몹시 애가 타더군요. 그런데 집을 나간지 4일 만인 30일에 그분이 아현동 집으로 오셨어요. 사복으로 갈아입고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섭데다.

<변소복도에 지하실 파고 은신>
그분은 수도방위사령관의 중책으로 미아리고개에 출전했지만, 실제로 지휘권이나 이렇다 할 부대도 없이 창경원 앞까지 밀리면서 싸웠는데, 적 탱크가 앞서 시내로 들어 가더래요. 그래서 창경원 속으로 뛰어 들어가 숨었다가 명륜동의 친척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남산으로 갔대요. 거기서 국군 낙오병들을 데리고 도하하려다 적을 만나 이틀인가 싸우다 흩어졌답니다.
때가 늦어 도하를 못하고 나를 찾아 온 거지요. 7일간 아현동에 숨어 있는데, 적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용문 대령이 서울에 숨어있으니 찾아라」고 체포령을 내렸어요. 아현동집이 위태로워 신당동에 있는 그분 외사촌 누님 댁으로 밤에 옮겼죠. 그분은 얼굴과 몸집이 큰데다 피부가 희어서 한번 본 사람은 기억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잠복생활이 더 어려웠지요.
그 집에서는 변소 가는 복도에다 조그만 굴을 파 놓고 밤에는 거기 들어앉아 「라디오」를 듣곤 했죠. 나는 10세 짜리 장남 건개 등 3남매를 데리고 운지동에 셋방을 들었습니다. 같이 있으면 나나 아이들을 보고 누가 알아낼까 봐서 였지요. 그분은 가택수색이 심할 때는 내수동 종로5가 등의 친지 집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죠. 이렇게 석 달을 피해 다녔지만 아는 사람들이 밀고를 안 해서 끝내 무사했습니다.』 (이상은 부인의 말) 『어릴 때지만 괴뢰들이 아버님을 찾아내려고 벽보를 써 붙이는 것도 보았고, 잡히면 끝장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수복 날 적 들어와 "사복 달라">
아버님은「라디오」를 듣고 주위 사람들에게 「곧 정세는 역전된다」고 말하던 생각이 나요. 어머님은 나를 절대 밖에 못나가게 했고요. 연지동에 있을 때 하루는 어머님 동창인 한 영치과의 이순영씨가 찾아와서 국군특공대가 아버님을 구출하러 왔다고 말해요. 특공대원은 자기병원에 두고 왔는데 마포강가에 작은 배까지 마련해두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어머님은 그 특공대라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고 또 체포령이 내려있는데 인상과 체구가 특이해서 남의 눈에 잘 띄는 아버님이 도저히 마포 강까지 갈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9월 20일에는 아버님이 연지동에 와서 함께 있었는데, 얼마 안 떨어진 정신여학교가 그들「빨치산」본부예요. 그자들의 떠들고 움직이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아버님은 뭔가 열심히 「메모」를 하셔요.
28일 낮1시쯤 남산서 내려오는 미군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데 갑자기 괴뢰군 3명이 들이닥치며 총을 겨누어요. 그들이 총으로 아버지를 쏘려고 겨눌 때 어머님이 동생을 업은 채 가로막으며 「나를 쏘라」고 뛰어들었어요. 그때 탕 소리가 나며 장독이 깨졌어요. 위협발사를 한 거지요.
나는 그때 너무 무서워서 큰소리로 울기만 했습니다. 그자들은 갈아입을 옷을 달래요. 그들이 아버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어머님은 얼른 아버님의 금시계를 풀어주면서 「동무들, 빨리 후퇴해야 살아요」라고 타이르니까 나갑디다. 1시간 후에 국군이 운지동에 들어왔지요. 마지막 판에 큰일날 뻔했습니다.』 (이상은 장남 이 건개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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