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고문의 계절 … 돈 빌려 선물하고 밥 사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귀향보고회는 의원이 면·동 단위를 돌면서 당원을 모아 놓고 그동안의 의정활동을 들려주고 간단한 회식 등을 하는 게 보통이다. 당원은 아니지만 지역구 내 경제인·예비군중대장·정화의원장·경찰서 간부 등 유지들을 따로 만나 별도의 보고회(?)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이래저래 한번 귀향활동을 하려면 최소한 500만원, 많게는 몇천 만원이 들기 때문에 요즘 의원들이 모이기만 하면 돈타령이다.”<1983년 12월 17일자 중앙일보>

 “정치인에게 명절은 ‘고문의 계절’이다. 당원들과 활동장·통책·반책 등 자신을 위해 뛰어준 사람들에게 하다 못해 양말 한 켤레라도 돌려야 한다. L의원은 선물비와 귀향보고비를 합쳐 2400만원을 투입했다. 추석 선물로는 계절이 계절인지라 마늘·참기름·미역·고추·어리굴젓 등 지역특산품이 인기다.”<1991년 1월 20일자 중앙일보>

 1980, 90년대 의정활동(귀향)보고회는 인력과 돈을 대거 투입하는 행사였다. 15대 국회(96년) 때 국회에 입성한 원유철(4선·경기 평택갑) 새누리당 의원은 “과거 추석 때면 의정활동을 알리기 위해 경로당·사회복지시설을 찾는 데 과일이나 음료수 한 박스라도 들고 가야 했기 때문에 적어도 수백만원은 들었다”며 “도·시·구의원과 청년위원장 등을 대동해 대규모로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민주당 김영환(4선·경기 안산 상록을) 의원도 “과거엔 당원들에게 과일이나 술, 치약, 칫솔 같은 것을 선물해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특히 80년대엔 명절을 앞두고 당원 단합대회를 의정보고회 형식으로 하는 의원도 있었다. 1개 선거구당 평균 3000명의 당원을 면별로 나눠 계곡·관광지 등으로 데려가 의정 활동상을 담은 팸플릿을 돌렸다. 84년 중앙일보에 따르면 중식과 교통비를 부담하는 건 물론이고 ‘500원짜리 타월 한 장, 200원짜리 재떨이나 1000원 상당의 세숫대야’ 선물을 제공하느라 1000만원 가까이 쓴 의원도 있었다.

복덕방서 의정보고 테이프 들어
당시엔 의정보고회에서 선물과 향응을 제공해야 조직관리·홍보 효과가 크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목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돈을 꾸거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는 의원도 있었다. 84년 기록에 따르면 의원들은 의정보고회를 치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을 하는 동창들이나 친지를 찾아가 ‘동냥’을 받거나 ‘강탈한다’”고 토로했다. 한 의원은 “군별로 핵심당원 1000명씩 중식만 제공하는 경비도 마련하지 못해 금융기관의 무담보대출을 받아 해결할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의정활동 내용을 각인시키기 위한 의원들의 노력도 남달랐다. 91년엔 호화판 의정보고서와 오디오·비디오 테이프를 활용한 홍보물이 등장했다. 당시 기록이다. “김종필 최고위원은 4.6배판 크기의 아트지로 16쪽 컬러 화보 형식으로 (의정보고서를) 꾸몄는데 5만 부를 돌린 총 경비가 2000만원이었다. 양성우 의원도 국회 발언을 녹음한 의정보고 테이프를 5000개 돌렸는데 ‘복덕방에서 유권자들이 모여 앉아 이 테이프를 듣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자랑했다. 한 의원은 자신의 국회 발언 모습을 찍은 두 종류의 비디오테이프 500개를 당원 교육용으로 돌렸다. 편집비용 100만원과 복사테이프 개당 500원 등 모두 15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의정보고서의 호별 투입에는 50명 당원에게 일당 3만원씩 주고 2~3일이 소요돼 배달비용이 400만원 정도 들었다고 했다.”<1991년 12월 29일자 중앙일보>

 이 같은 고비용 의정보고회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정치권엔 선거법 위반 주의보가 내려졌다. 99년 9월 국민회의는 추석을 앞두고 ‘귀향 활동 때 유념해야 할 주요 선거법 위반행위’란 8쪽짜리 자료집을 배포했다. 선거법에 걸리지 않는 행위로 ‘의정보고회 때 선거구민에게 3000원 이하의 다과류 제공’을 들었다. 당시 중앙선관위는 추석 인사를 구실로 한 선물 제공, 귀향 인사를 명목으로 한 현수막 설치, 민속놀이 찬조 행위 등을 집중 단속했다.

300여 회 의정보고회에 10억원 쓰기도
하지만 고비용 의정보고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총선을 앞두곤 오히려 늘어났다. 검찰은 96년 총선 직전 열린 각종 의정보고회를 조사한 결과 “한 지역구당 평균 5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를 활용한 것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평균 200만원씩 활동비를 받은 것으로 추정할 때 지구당마다 이들에게만 1억원의 비용이 지출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서울 지역 중진 D의원은 약 220회의 의정보고회를 열었다. 당시 수도권에 출마한 또 다른 후보는 “통·반 단위로 연 300여 차례의 의정보고회에만 벌써 10억원을 썼다. 선거법엔 3000원 이하의 다과만 대접하도록 돼 있지만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1인당 6만원씩은 써 이번에도 30억원은 족히 들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도 2004년 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이 한꺼번에 개정되면서 바뀌었다. 선거구민에게 경조사비와 명절 선물, 소액 선물을 건네는 행위가 금지되고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이 모두 묶였다. 법 개정 초기엔 주민들이 법이 바뀐 것을 몰라 의원들에게 “명절에 빈 손으로 인사 오느냐”고 핀잔을 주는 등 해프닝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몇몇 의원들은 당원들을 모아 놓고 당 대표나 다른 의원들의 이름으로 과일 등을 돌리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현재 국회의원이 의정보고회에 참석한 지역 주민에게 차·커피 등 음료(주류는 제외)를 제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식사나 다과를 제공하면 공직선거법 113조 위반이다. 그런데도 2011년 경남 지역 유권자 140명은 국회의원의 의정보고회에 참석해 식사 등을 제공받았다가 선관위로부터 총 7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비용 의정보고회는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는 게 선관위와 의원들의 전언이다. 요새는 한 곳에 사람들을 모으는 대신 의원들이 재래시장이나 대형 할인마트 등을 다니며 유권자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다. 의정보고서도 e메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뿌리면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결국 국회의원이 선거구민과 소통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며 “의정 홍보는 단기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하고, 주민들에게 들은 내용을 실질적으로 의정에 반영해 입법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백일현 기자

관련기사
▶ 악취 진동하는 아파트 정화조에 코 박은 국회의원들, 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