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 실태 보러 배 타고, 악취 확인하려 아파트 정화조 점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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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민들은 제가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말 한마디 들어주는 걸 더 좋아합니다. ‘추석 의정보고회’ 대신 ‘한가위 소통모임’이란 말을 쓰는 이유죠.”(영남 지역 한 다선 의원)

 국회의원들의 표밭 관리 대목인 추석 귀향 활동이 달라졌다. 치적 홍보 대신 유권자들의 쓴소리와 민원 듣기에 주력한다. 주민 수백 명을 동원한 보고회 대신 마을회관·경로당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유도한다. 민원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일도 많다. 높아진 민도에 대응하는 변화의 몸부림이 추석 의정에도 어김없이 번지고 있다.
 

“SNS로는 주민과 원활한 소통 힘들어”
지난 11일 오후 4시. 새누리당 하태경(49·부산 해운대 기장을) 의원이 기장 앞바다로 배를 타고 나갔다. 추석 활동차 지역구를 찾았다가 해파리 떼가 바다를 뒤덮어 조업이 힘들다는 주민들의 호소를 듣고 실태 파악에 나선 것이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급새’(돌풍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큰 파도)가 치면서 하 의원이 어민·군청 관계자 10여 명과 함께 탄 어업지도선은 낙엽처럼 흔들렸다. 30분쯤 뒤 조업 중인 쌍끌이 어선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 의원을 알아본 어부들이 자신들이 끌어올리던 그물을 가리켰다. 수박만 한 해파리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 올라왔다.

 “끔찍하게 올라오네예.”(하 의원) “가을이 되니까 이놈들(해파리)이 딴딴해져서 20~30t씩 올라옵니더. 이놈들 독 때문에 그 많던 멸치 씨가 말랐다 아입니까. 저도 독이 오를까봐 화이바(헬멧)에 고무장갑 끼고 조업하고 있어예.”(용성호 박윤봉 선장)

 두 시간가량 현장을 둘러본 하 의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실태가 심각하다. 피해액이 3억원을 넘으면 정부에 신고할 수 있다”며 “오늘 찍은 동영상을 상임위에 보여줘 구제받을 길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새누리당 남경필(48·경기 수원병) 의원은 10일 오후 3시 지역구인 수원시 우만3동의 한 아파트를 찾아 정화조 근처에서 이리저리 냄새를 맡았다. 주민 한 명이 “정화조에서 냄새가 난다”고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남 의원을 만난 주민 양영애씨는 “정화조 바로 앞 동 사람들은 밥도 먹지 못할 만큼 냄새가 심하다”고 말했다. “어디 직접 맡아봅시다”라며 정화조에 다가간 남 의원은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잘 챙겨보겠다”라고 말했다. 남 의원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선 주민들과 원활히 소통하기 어렵다. 이렇게 현장을 둘러보면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매년 주기적으로 현장 출동에 나설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야 텃밭은 ‘쓴소리 들어주기’가 대세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지 6개월이 지났는데 농업 정책은 와 아직 나온 게 없는교? 농기계값이 20년 전 영샘이(김영삼)정부 때보다 세 배는 올랐는데 쌀값, 과일값은 더 떨어진 건 와인교(왜 그래요)?”

 6일 오후 3시. 새누리당 김재원(49·경북 군위-의성-청송) 의원은 의성읍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농민 신훈식(59)씨의 질문공세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과수농사를 짓는 유권자들을 위해 마련한 ‘김재원과 함께하는 찾아가는 국회’ 자리였다.

 농민 박도경(58)씨도 “농약 기계를 4000만원 주고 샀는데 1년 쓰고 중고시장에 내놨더니 1000만원밖에 안 쳐주더라. 농기계업체의 횡포를 국회에서 조사해야 하는 것 아인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농촌 사람들이 정말 똑똑하다. 자신이 직접 겪는 문제를 분명히 알고 있다. 민원 중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10개 중 1~2개밖에 안 되지만 국정감사 소재도 많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김성주(49·전주 덕진) 의원도 추석을 앞두고 지역구를 찾아 쓴소리를 들었다. 12일 낮 전주시 덕진구 송천성당에서 60~80대 주민 60여 명을 만난 자리에서다. 민주당 지지가 약한 노인층을 공략하려는 취지다. 강의를 들은 한 주민은 김 의원에게 “박근혜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을 환수했는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왜 안 했냐”라고 따졌다. 김 의원은 “그때는 본인 재산만 환수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민주당이 법을 만들어서 자녀·친지에게도 걷을 수 있게 된 것”이라 해명했다. 그러자 또 다른 참석자가 “테레비(TV)를 보니 민주당이 국회에선 아무것도 안 하고 밖에서 농성만 하는 것 같다.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그래도 일본발 방사능 오염수 피해 같은 긴급한 현안은 국회를 열어 논의한다. 민생을 팽개치고 국정원 개혁만 외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박근혜가 자기 아버지처럼 국정원을 이용해 나라를 휘두르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라며 호응하는 주민이 나왔다. 김 의원은 “이 지역에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건 옛 얘기다. 주민들 쓴소리를 직접 듣고 고칠 걸 고치지 않으면 언제든 외면당할 수 있다. 주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의원 아닌 유권자가 모임 비용 내
“추석 앞두고 모인 자리니 제가 쏩니다!” 10일 오후8시40분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의 한 호프집. 민주당 이언주(41·경기 광명을) 의원과 주민 9명이 마주 앉았다. 이 의원이 지난해 19대 국회에 입성한 이래 매달 열어온 ‘타운홀 미팅’ 스타일의 의정보고회 자리다. 맥주와 치킨·샐러드·소시지를 시켜 모두 6만2000원이 들어갔다. 한 참석자가 이 비용을 자진 부담했다.

 의원이 주민들 만나면 돈을 써야 한다는 통념을 깬 자리였다. 지역 특성상 참석자 가운데 40대 자영업자·주부가 많아 지역 민원만큼이나 정치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갔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는 어떻게 다룰 거냐.”(주민 L씨) “후쿠시마 인근 8개 현에서 나온 일본산 농수산물은 전면 금수가 맞다고 본다.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오늘 여당 복지위원들을 만나 강력하게 요구했다.”(이 의원)

 “민주당이 왜 당 색깔을 파란색으로 했느냐. 촌스럽다.”(주민 K씨) “원래 파란색은 진보와 개혁의 상징이다. 새누리당이 이 색을 잘못 쓴 것뿐이다.”(이 의원)

 이날 처음으로 타운홀 미팅에 왔다는 주민 한금희(46)씨는 “의원에게 직접 국회 상황을 들을 수 있고, 민원도 바로 얘기할 수 있어 좋았다. 호프집이라 분위기도 자연스러웠다”고 평가했다.

 각 의정보고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의원이 우리들 말에 그냥 ‘네네’만 하지 말고 국회에서 확실하게 애프터서비스를 해줘야 의미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새누리당 길정우(58·서울 양천갑) 의원은 최근 종이 대신 스마트폰으로 추석 의정보고서를 냈다. ‘길이면 통한다’란 제목의 애플리케이션에 “지난 1년간 도서관·노인센터를 만들고 초·중·고 학생들의 진로 멘토링을 하는 등 지역구를 위해 뛰었다”는 내용을 담았다.

 길 의원실 관계자는 “종이로 의정보고서를 배포하면 유권자들이 한 번 보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유권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예전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읽어본 소감도 남길 수 있어 쌍방향 리액션이 가능한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또 20만 지역구민을 대상으로 종이 의정보고서를 내면 3000만원가량 들어가는 반면에 스마트폰은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데다 다운로드 수를 통해 의원에 대한 관심도도 파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류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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