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버스기사 하려면 500만원 내라 … 할 사람 줄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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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택시기사를 하던 공모(45)씨는 서울 시내버스 기사 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높은 소득에 정년도 보장되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공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버스회사 간부 A씨에게 부탁했다. A씨는 자신이 받을 200만원과 채용 임원에게 줄 현금 100만원을 요구했다. 고심 끝에 돈을 건넨 공씨는 몇 주 뒤 기사로 채용됐다. 공씨는 “‘당신 아니라도 들어오려는 사람 많다’는 말에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며 “동료들이 300만원은 싼 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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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내버스 기사 채용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버스회사는 물론 노조까지 채용을 미끼로 뒷돈을 받았다. 지난 6일 서울남부지검은 마을버스 기사들에게 ‘6개월 근무 후 정식 채용’을 조건으로 300만~500만원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업체 대표 여모(45)씨를 구속했다.

 다른 버스회사 노조원 김모(57)씨 등 4명도 정규직 버스기사 취업을 도와준다며 구직자들에게 2600만원을 받은 혐의로 8일 도봉경찰서에 불구속 입건됐다.

 채용 비리가 발생하는 건 시내버스 기사의 대우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버스 기사의 평균 연봉은 약 4100만원이다. 택시·마을버스 기사의 2배 수준이다. 2004년 시내버스 준공영제가 도입된 뒤 임금과 퇴직금 체불 걱정도 거의 없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 시내버스 66개사에서 채용한 버스기사는 639명이다. 서울시내 버스기사 수가 총 1만6000여 명인 걸 감안하면 정년퇴직 등으로 인한 자연감소 인력만 보강되는 셈이다. 대부분 수시채용이어서 업체 간부나 노조 간부의 영향력이 크다.

 ‘뒷돈’이 횡행하지만 적발하긴 어렵다. 돈을 건넨 사람이 고발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버스기사 박모(46)씨는 “비리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는 고발자를 우선 해고한다”며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해 승소해도 복직하는 데 2~3년이 걸리므로 신고할 엄두를 못 낸다”고 말했다.

 일부 노조도 비리의 한 축이다. 브로커 역할을 하는 기사가 구직자를 알선하면 돈을 받은 일부 노조지부장과 간부가 회사에 채용을 요구한다. 버스기사 정모(57)씨는 “일부 노조는 회사와 담합해 채용 인원의 30~40%를 노조 몫으로 받는다”고 말했다.

 준공영제의 한계점도 원인으로 꼽힌다. 준공영제는 서울시가 노선조정과 감차 권한을 갖는 대신 업체의 운영 적자분을 보전해 주는 제도다.

준공영제 예산으로 버스기사의 대우를 높이자 버스 서비스의 질도 좋아졌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운영비용을 보장하다 보니 일부 부실 업체들은 경영실적과 서비스 개선은 외면한 채 ‘취업장사’등 부당행위에 나서고 있다. 남부지검에 구속된 여모 대표는 회사 부채로 수익금이 채권단에 압류되자 회사직원 20여 명의 퇴직서류를 거짓으로 꾸며 4억여원의 퇴직금을 부당 수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채용 비리가 잇따르자 지난 2월 적발된 업체는 성과이윤 평가에서 1건당 500점을 감점하는 대책을 내놨다. 서울시는 매년 투명성·안전관리 등을 2000점 만점으로 평가해 성과이윤을 각 업체에 차등 지급한다. 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버스기사 채용 과정에 시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림대 김필수(자동차학) 교수는 “시가 외부 면접관을 두고 공개채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종우 서울시 버스정책과장은 “시나 제3의 기관이 공개채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인사권이 업체 소관이라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계명대 박용진(교통공학) 교수는 “시가 채용 과정에 개입하려면 버스업체를 직접 운영하는 완전공영제가 필요하다”며 “예산 부족 등으로 어렵다면 비리 업체에 대한 지원을 끊는 등 강력한 처벌 방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승호·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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