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아더밀러」저「세일즈맨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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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특히 여성에게 유익한 희곡을 추천하란다. 자연 손닿는 곳에서 고르기 마련이요, 그러다 보면 내가 번역한 작품에 애착이 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유독 여성만을 위해서 쓴 문학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굳이 추천하란 다면「세일즈맨의 죽음」을 권하고 싶다. 이 작품을 쓴 이는「아더·밀러」라는 미국의 현존 극작가이다. 내가 이 작품을 번역해서 한국 초연으로 막을 올린 것은 부산에서 환도하던 해 겨울에 있었던「테아트르· 리블」 의 공연이었다. 그후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상연된 것은 극단「신협」의 공연이었으며 김동원·최은희·장민호·박암씨 등이 주요 출연자들이었다.
내가 이 작품에 매력을 느낀 것은 작가가 여러 가지 참신하고도 특이 한 극작 술을 구사한 이유도 있지만 어딘가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정서를 이 작품에서 느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하긴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다를 뿐, 온 세계 인류가 지닌 감정이란 따지고 보면 같은 것이겠지만「세일즈맨의 죽음」의 부자관계·부부관계·모자관계·그들 가족이 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우리네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덮어놓고「잘났다, 잘났다」하고 자식을 잘못 기르는 아버지는 비단 이 작품의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측은한 존재요, 남편을 위하고 자식들도 사랑하지만 특히 부모 공경하는 효도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어머니는 한국 여성만의 미덕이 아니라 이 작품의 어머니가 지닌 미덕이기도하다.
그뿐이랴.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하고, 특히 아버지의 허황 된 꿈을 깨뜨리려고 애쓰는 장남의 심기 굳고 믿음직한 효성 역시 전통적인 한국의 장남에서 볼 수 있는 상이다.
얼른 보기엔 이 작품의 장남은 건달이요, 불효로 보일지 모르나 거듭 음미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아버지와 어느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끝내 혼자만 알고 있고 가족에게 폭로하지 않는 이 장남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가족 애의 틈바구니에서 지궁스레 남편과 자식들을 사람하며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아내상과 어머니 상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물들이기도 귀찮아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살이 역력하지만, 그리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미안해하는 이 고난의 여인상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알뜰히 살면서 이제 25년만에 저당 금을 다 치러내 집 한 채를 마련했지만 남편의 자살을 애통해 하는 이 여인의 외로움을 나는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 번역을 개역해서 다른 분들과의 선집 속에 이 작품을 수록했다. 그러니까 일거 양득으로 그분들의 번역으로 된 작품도 읽을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정음사 간 신역 세계문학전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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