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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플라톤 "분노는 정의를 향한 영혼의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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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손병석 지음
바다출판사, 560쪽
3만2000원

“화를 내며 보내기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BC 4∼AD 65)의 말이다. 그의 저서 『화에 대하여』는 인간이 화를 내는 일의 부질없음을 지적한 고전으로 꼽힌다.

 세네카가 볼 때 분노는 악이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아는 현자(賢者)는 세네카의 이상형이다. 그런데 현자가 되려는 이성적 결단을 내렸다가도 작심삼일에 그치고 마는 것이 대다수 인간이 아닐까.

 세네카의 현인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면 이 책에서 위안을 받을만하다. 분노를 키워드로 서양 고대철학과 문학작품을 분석했다. 분노의 여러 얼굴을 보여준다.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다.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다. 불의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오히려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일부. [중앙포토]

 저자는 아테네대학에서 서양 고대철학을 전공한 손병석 고려대 교수. 그는 고대 분노의 양면성을 펼쳐 보인다. 이 책에서 세네카는 ‘분노 철학’의 한 축을 담당한다. 저자가 볼 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분노 철학의 또 다른 한 축은 플라톤(BC 427~BC 347)과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 )다.

 분노는 폭력과 테러, 살인 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돼 왔다. 세네카가 분노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의 긍정적 측면까지 탐색했다. 그간 우리 사회에 그 부정적 측면이 주로 소개됐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분노의 긍정성을 재평가하는 셈이다. 그것은 짧게 말해 이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노다.

 저자는 먼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일리아스』 첫 대목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아끼는 노예 소녀 브리세우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분노한다. 그리스 고전문학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분노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 호메로스의 작품에 잇따라 등장하는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야만적 감정이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영웅시대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당시 분노는 대개 명예를 빼앗겼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사회적·정치적 의미의 분노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플라톤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튀모스’라는 덕목을 분노의 주제와 연결시켰다. 기개 혹은 기상으로 번역되며 불의에 대해 느끼는 공분(公憤)을 의미한다. 저자는 튀모스에 대해 “부정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분개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능력”이라며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며, 사적인 것이라기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고 풀이했다. 또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국가의 성공적인 건설과 안전은 튀모스 교육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어떻게 보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에서 제시된 분노는 중용(中庸)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에 내재된 과도한 폭력성을 경계하면서도 분노가 중용에 따라 표출되면 괜찮은 감정으로 간주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중용을 지키지 않는 일이라고 보았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함을 포착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노가 단순히 억제의 측면만이 아닌 ‘이성과의 조화’나 ‘적합한 표출’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시인 변영로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고 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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