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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54년 정초에 이대통령은「클라크」「유엔」군사령관의 초청으로 또다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었다.
당시 주일대표부는 김용주 공사의 사임 후 신성모 대사를 거쳐 김용식 공사(현「유엔」대사)가 대표로 와 있었다.
「클라크」대장이 이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한-일간의 국교가 두절되어 다 같은 자유국가이면서도 지난날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칫하면 적대국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유엔」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이대통령을 동경으로 초청한다면 자연 일본정부의 수뇌부와도 서로 만나게될 것이요, 양국의 수뇌자가 한자리에 모이게되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단된 채로 있는 한-일 회담도 다시 열릴 무슨 단서가 열리지나 않을까 하는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일 양국의 불화로 말미암아 중간에서 골치를 앓고 있던 미국측으로서는 응당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일로서 어느 날 저녁 동경에 있는 미국대사관 관저에서는 이대통령의 환영「파티」가 개최되었었다. 그날의「파티」에는 특히 일본정부의 수뇌도 초청되어「요시다」(길전)수상과「오까사끼」(강기)외상이 참석했는데 만찬이 끝난 다음 응접실「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실 때「클라크」대장과「머피」주일 미 대사는 일부러 이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길전 수상을 앉게 하여 되도록 두 사람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였다.
길전 수상도 모처럼 만나게 된 이웃나라 원수에 대해서 무엇이고 재치 있는 말을 하나 하려고 했든지『대통령 각하, 한국에는 지금도 호랑이가 많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이대통령은 즉각적으로『글쎄요, 예전에는 호랑이가 퍽 많았다는데 임신왜란 때 가등청정이가 다 잡아가서 지금은 별로 볼 수 없습네다.』
이 대통령의 대답이 이 같으매 길전 수상은 무색해서 말문이 막히어 더 대꾸를 못하고 좌중의 공기는 갑자기 냉각되었다. 얼마나 슬기롭고 의미심장한 말이냐? 유머를 섞은 이대통령의 그 말은 비록 짧고 온화하였으나 그 속에는 칼날을 품은 듯한 날카로운 풍자가 들어 있었으면 왜정치하 36년 동안에 우리 한민족이 품고 있던 원한과 분노가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위「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격으로 뜻밖에「호랑이문답」때문에 한-일 양국의 친선은커녕 도리어 역효과가 나타나게 되자 당황한「클라크」대장은 좌중에 공기를 다시 호전시키기에 땀을 뺐으며 따라서 이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다만 예방에 그쳤을 뿐 한-일 양국의 국교 회복에는 아무런 좋은 영향도 주지를 못하였다. 그 소문이 쫙 퍼지자 일본사회에는 큰 이야깃거리가 되어,『길전 수상은 왜 하필 호랑이이야기를 끄집어내어서 창피를 당한담!』
『길전 수상도 뱃심이 어지간하지만 암만해도 이승만 대통령만큼은 못한 모양이야!』라고들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이 폐전 후 그때까지 전후 7년 동안 정권을 잡고 임명한 각료만도 무려 1백여명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길전 수상은 일찌기 주미대사를 지내 영어도 잘할 뿐더러 뱃심과 고집도 상당해서 점령 중에「맥아더」원수와 1대l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은 당시 8천만 일본인 가운데 오직 길전 수상 한 사람뿐이라고까지 일컬어져 그때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길전 수상을 우리 이대통령에게 비유하여 오던 터인데 전기「호랑이문답」으로 인해서 그 승부는 누가 보아도 이대통령의 완전승리로 판결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같이 노련하고 영특한 이대통령이 어찌해서 가엾은 우리 영친왕에 대해서는 그다지도 냉혹하고 무자비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그 점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호의가 없었고 교만 방자하고 앙칼지기로 유명한 길전 수상은 영친왕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백방으로 주선하여 조금이라도 영친왕을 도우려고 힘썼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나는 그 경위를 해명할 것이다. <계속>
필자주=가등청정은 임진왜란 때 한국에 온 위군의 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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