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경제 르포] 외환위기설 인도네시아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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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위치한 면적 10만㎡ 규모의 한 대형 복합 쇼핑몰 내부가 텅 비어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는 ‘거품 경제’로 인한 착시 효과에 부동산 투기심리가 더해져 대형 쇼핑몰 30여 개가 경쟁적으로 들어서면서 고객 확보에 실패한 곳도 생겨나고 있다. [자카르타=김영민 기자]

지난달 2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수카르노-하타 공항. 입국장을 나서자 맨 먼저 눈에 띈 가판대에서 현지 신문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활자로 인도네시아에 닥친 ‘경제위기’를 전하고 있었다. ‘주가지수, 13개월 만에 최저치’ ‘루피아화 환율 38개월 만에 최고치 경신’….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이 현실화하면서 환율·주식 등 금융시장이 붕괴되고 이 위기가 곧 실물부문까지 번질 수 있다는 분석기사도 보인다.

자동차·패션 등 과시형 소비 급증

 하지만 현지 언론과 국내외 시장분석 기관의 경고는 공항을 나서자마자 ‘다른 나라 얘기’처럼 느껴졌다. 자카르타 도로는 도요타 캠리, 렉서스, 혼다 어코드 같은 일본산 중대형 승용차로 빼곡했다. 중심가 탐린 거리에는 벤츠·BMW·재규어 등 외제차 할부금융 광고판이 경쟁하듯 서 있었다. 2008년 이후 미국의 양적완화가 본격화되면서 시중에 돈이 풀리자 인도네시아는 ‘마이 카’ 시대를 맞았다. 유류세 감면까지 받게 되자 시민들은 차량구입에 뛰어들었다. 최근 승용차를 구입했다는 자카르타 시민 라라스(24)는 “경제가 위기라고들 하는데 별로 신경 안 쓴다. 망하면 바나나를 먹고 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 인도네시아의 자동차 판매량은 2008년 60만3774대에서 지난해 111만6230대로 5년 새 두 배 가까이 폭증했다. 인도네시아 우리은행 본점이 입점한 자카르타 증권거래소 빌딩에서부터 하나은행 현지 본점이 있는 국영통신사 빌딩까지 5㎞ 거리를 오는 데 승용차로 1시간30분이 걸렸다. 폭증하는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한 자카르타 시 정부가 6월부터 오후 4~8시 ‘3 in 1(자동차 한 대당 무조건 3명 이상 탑승)’ 제도를 시행할 정도다. 이를 어기면 벌금 60만 루피아(약 6만원)를 내야 한다.

1년 새 사무실 임대료 46% 치솟아

 부동산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자카르타 시 집계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오피스용 사무실 임대료가 46%, 주거용 아파트 임대료는 11.2% 상승했다. 중앙상업거래지구(SCBD)의 3.3㎡(1평)당 가격은 200만 루피아, 한화로 약 2200만원에 달했다. 이곳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 ‘퍼시픽 플레이스(Pacific Place)’의 경우 방 4개짜리 레지던스의 한 달 임대료가 8000달러(약 855만원)를 웃돈다.

조용우 인도네시아 외환은행장은 “풀린 돈이 소비를 뒷받침하고 이런 소비 때문에 경제가 잘 돌아가는 착각을 갖게 된다”며 “인도네시아의 진짜 문제는 경제위기보다 위기 불감증”이라고 말했다.

자카르타에만 복합 쇼핑몰 250개

‘거품에 취한 소비’는 자카르타 복합 쇼핑몰 수에서도 나타난다. 이달 현재 250개로 최근 5년 새 30% 이상 늘어났다. 2015년이면 중산층·상류층을 겨냥한 쇼핑몰 30개가 추가로 오픈한다. 지난해에만 패션 분야 매출이 22%, 스마트폰 매출은 23% 성장했다. 루피아값이 떨어지자 수입산 전자제품을 비롯해 수입물가는 폭등세를 보이고 있지만 과시형 소비 풍조 탓에 판매가 늘어난 것이다.

한국의 용산전자상가와 비슷한 자카르타 ‘하르코 글로독’에서 삼성 노트북(11인치)은 한 달 새 가격이 10% 올라 1200만 루피아(약 12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이장희 KOTRA 자카르타 무역관 부관장은 “단기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점이 버블(거품)이 빠지는 시점이 될 것이란 경고가 있지만 자기 과시를 위한 소비는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단기 외채가 인도네시아 경제의 뇌관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2007년 말 186억5400만 달러였던 단기 외채는 올 상반기 현재 466억7800만 달러로 2.5배나 늘었다. 특히 이 기간 공공부문 부채는 40억 달러 느는 데 그친 반면 민간부채는 이보다 6배나 많은 240억 달러가 늘어났다.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풀면서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 외채는 2009년 36.4%에서 47.6%까지 상승했다.

"경제 거품 조만간 곪아 터질 것”

현장을 함께 둘러본 박주영 숭실대 교수는 “제조업 육성, 생산성 향상 같은 구조조정은 뒤로 한 채 내수 소비, 부동산 거품으로 지탱해온 근본 문제가 조만간 곪아 터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프레드 뉴먼 HSBC은행 아시아 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값싼 자금이 밀려왔을 때 구조개혁을 제대로 못했고 이제는 기회마저 잃었다”며 “체질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향후 인도네시아가 장기간 침체기를 겪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자카르타=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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