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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번지 없는 1일 주택 「텐트」의 마을|김찬삼 여행기 <호주에서 제4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시드니」시를 떠난 관광 버스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을 누비며 북쪽으로 향하여 달리고 있다. 어떤 젊은 여성이 느닷없이 발을 구르면서 『저것 보세요하고 외치는 바람에 놀라서 그쪽을 보니 캥거루 한 놈이 길가의 전원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지 않은가. 새끼 캥거루 한 마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달리는 율동적인 점프의 동작이 매우 미묘하며 사람의 무용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발레의 귀재라고 하던 「니진스카」도 감히 이런 예술적인 도약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판솔」(공중에 추는 춤)의 극치가 아닐까 싶도록 포물선을 그리며 스치듯이 묘하게 뛰어넘는 그 액션은 어쩌면 캥거루의 고도의 발레 예술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도 이 캥거루의 호주머니는 크나 큰 해학을 불러일으켰다.
새끼 캥거루가 얼굴만 내밀고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이 모성애로 말미암은 보존 본능보다는 어떤 유머를 간직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조물주 (자연이 더 좋다)는 진선미보다는 해학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짐승을 만든 것이 아닐까.
이런 시상이 문득 떠올라 캥거루에 대한 첫 인상을 이야기했더니, 영국 사람 한 분은 『그것 참 좋은 관찰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자랑하는 고학 문학가 「버나드·쇼」도 아마 캥거루에 대해서 그런 멋진 표현은 못한 것 같소. 한국 사람은 비극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들었었는데 그렇듯 멋진 유머를 다 가지고 있군요』하며 나를 추어 올렸다.
괴테도 말한 것처럼 자연에서 어떤 예술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이 할 일이 아닐까. 이 세계를 사람과 심미안으로 보면 볼수록 무한한 신비와 희열을 자아내게 된다. 여행의 멋이란 알고 보면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하는 자연에 감정이 몰입을 해보면 주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단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낯선 나라의 하늘에 뜬 조각 구름하나 헛되지 않다. 더구나 최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캥거루의 호주머니에서 풍기는 해학은 신의 창조 정신을 전달하는 무슨 묘미라도 되는 것이 아닐까.
「뉴사우드웨일즈」주의 자연은 아름답다. 도중에 어떤 마을에서 잠시 쉴 때였다. 호주를 상징하는 「다이어버드」(칠현 금조)가 있다고 하면서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이날 짐승은 극락조에 못지 않게 멋있는 꼬리를 가졌는데, 수컷의 꼬리는 꼭 「릴라」란 고대 악기와도 같다. 그 모양도 독특하지만 여러 새들의 울음소리 뿐만 아니라 개 짖는 소리까지도 곧 잘 흉내를 낸다. 앵무새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가진 날짐승이다. 여기서 잠시 쉬며 이 새를 보고는 또 달렸다.
버스 속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담소와 희농으로 즐기는 가운데 해가 저물어 버스는 어떤 마을에 가까운 숲 속에 멎었다. 이 버스를 중심으로 텐트를 치고 식사 준비를 해야한다. 여자들은 「캐러번·파크」에 있는 야외 취사장에서 저녁을 짓느라고 장작을 피우건만 불피우는 솜씨가 워낙 서투르기에 내가 도와주었더니 앞으로는 불을 피우는 일을 도맡으라고 한다. 『나는 복종을 좋아합니다』 하고는 여성들의 명령에 따라 화부 노릇을 하기로 했다.
저녁들을 지어먹고는 샤워를 하고 각기 자기 텐트에 들어갔다. 이 나라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변두리에도 온·냉수의 시설이 잘 되어 있다. 텐트 속에는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고무 자루를 먼저 깔고 그 위에 스펀지를 올려놓고는 「슬리핑·백」에 들어가 자게 된다. 아직 이른 밤이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도 있다. 밤의 무드는 무르익어 가며 혼결과도 같이 많은 남녀들이 어울려 지낸다. 이 유랑의 무리들은 지금 「번지 없는 일일 주택」이라 할 텐트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광야에서 비치는 이 텐트 속의 촛불은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해진 옷을 꿰 메느라고 희미한 촛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여성 한 분이 우리 텐트를 기웃거리다가 이 모양을 보고 깔깔 웃으며 『「미스터·김」, 그 뭉툭한 손가락으로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요. 이리 주세요. 제가 꿰 메 드릴께요』하는 자비 아닌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이것은 다 여행이라는 마력이 빚어내는「무드」다. 그러나 생전 모르는 낮선 사람끼리 이렇게들 우발적으로 맺어져서 한 그룹을 만들어 여행을 즐기는데는 법률보다 더 엄한 도덕적인 규제가 있다.
세계는 우리의 도장 (학교), 우리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이 들이다. 인종·종교를 떠나서 우리 일행은 지금 인생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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