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국 백인 남성에게 식민지 타히티는 정녕 낙원이었겠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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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14면

1 고갱, 자화상, 1893

1891년 프랑스 화가 고갱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타히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고갱은 우리가 아는 수많은 명작을 그렸다. 왜 타히티였을까? 페미니즘 여성 이론가 그리젤다 폴록은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를 추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폴록은 “고갱의 작품은 식민주의와 관광주의의 영향 하에서 생산됐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 예증이 되는 작품이 ‘마나오 투파파오’다. 고갱은 이 그림을 아주 각별하게 생각해 이 그림을 배경으로 한 자화상도 남겼을 정도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45> 그리젤다 폴록의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원제 : Avant- Garde Gambits: 1888-1893) (조형교육, 2001)

그러나 폴록은 이 그림에서 화가인 고갱과 모델인 소녀 사이에 존재하던 ‘종주국 백인 남성과 식민지 유색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 코드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글에서 고갱은 그때 침대에 엎드려 있던 이 소녀가 “아주 사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 쏟아질 어떤 비난을 고갱도 의식하고 있었던지 다른 글에서는 이 어린 소녀가 “성교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음란하다고 비난한다. 사실 어떤 것이든 14살짜리 소녀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큰일 날 노릇인데, 당시 고갱은 이 소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보면 그가 이 소녀를 정중하게 ‘아내’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타히티에 있는 동안에는 유럽의 본처에게 열심히 안부편지를 썼고, 1893년에는 아무 기약 없이 타히티를 떠나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파리에 와서는 다시 자신의 이국적인 취향을 자랑하듯 다른 어린 흑인 혼혈 여성과 동거한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유럽의 그 누구도 이 어린 유색인종 소녀를 고갱의 ‘아내’로 인식하지 않았다.

미술사에서 후기 인상파 작가 고갱은 고흐·세잔과 함께 언급되며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고갱의 개인적인 부도덕함을 폭로해 흠집내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갱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식민주의와 관광주의’를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의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려는 아방가르드들의 분투와 연관해 해명하고, 더 나아가선 이것이 서구의 근대화에 내재해 있는 본원적인 속성이었음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2 폴 고갱, Manao Tupapau (‘저승 사자가 지켜보다’라는 타히티어) 1892

마네의 ‘올랭피아’가 고갱에게 미친 영향
고갱이 ‘마나오 투파파오’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두었던 작품은 마네의 ‘올랭피아’다. 고갱은 습작 시절에 이미 ‘올랭피아’를 그대로 모사한 적이 있었다. 1863년 발표 당시 뜨거운 논란이 되었던 ‘올랭피아’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재출품돼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또한 이 박람회에서 고갱은 타히티 민속공예와 공연 등을 보고 타히티행을 결심하게 된다.

마네와 고갱의 두 그림 모두에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마네의 ‘올랭피아’에는 백인 창녀 올랭피아와 흑인 하녀 로르가 등장한다. 마네는 이 인물들이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창녀와 그 하녀임을 명확히 했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올랭피아의 자세는 소위 ‘침대 위의 비너스’라는 전통적 도상을 따른 것이다. 침대 위에 누드로 누워 있는 여성들은 비너스 등으로 신비화되며 남성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마네는 이 전통을 전복시켰다. 그에게는 현실을 은폐하는 ‘신화’ 따위는 없었다. ‘탈신화한 현실’, 이것이 이 그림이 일으킨 논란의 핵심이었고, 마네가 도달한 ‘근대적 시각’이었다. 마네가 신화를 제거하며 닦은 길을 인상주의자들이 뒤따랐다. 마네는 새로운 미술의 리더가 되었다.

고갱의 그림에도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마네의 흑인 하녀는 고갱에게선 죽음의 유령으로 바뀌었고, 올랭피아의 자리에는 익명화된 어린 유색인종 소녀가 누워 있다. 소녀가 타히티 신화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보고 놀랐다는 신화를 차용해 마네가 애써 도달한 ‘탈신화한 현실’을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마네가 전통을 ‘참조’하고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에 대한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리더가 되었던 것처럼, 고갱 역시 마네를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차이’가 분명히 강조하는 아방가르드 전략을 사용했다. 타히티 그림들로 고갱은 예술 아방가르드로서 선두적인 지위를 인정받는다.

유럽 중심적이고 남근중심적인 문화
고갱은 ‘올랭피아’와 더불어 사라진 ‘비너스의 신화’를 원시적인 삶에서 다시 구현했다. 그러면서 고갱은 그림 속 소녀가 음란하고 수치심을 모른다고 비난했다. 식민지 여성의 ‘성’은 제멋대로 해석되고 유린됐다. 식민지를 원초적인 본능이 살아 숨쉬는 ‘원시적 에덴동산’으로 바라보는 것은 백인 남성들의 환상일 뿐이며, 그 환상으로 원주민의 처지를 바라보는 것은 “인식론적 폭력”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갱에 관한 많은 대중적인 책들, 예컨대 피오넬라 니코시아의 『고갱 : 원시를 갈망한 파리의 부르주아 』나 데이비드 스위트먼의 『고갱, 타히티의 관능』 같은 책들은 고갱이 순수한 낙원을 찾아서 타히티로 갔다는 식의 신화를 여전히 재생산하고 있다.

고갱의 관광주의적 태도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 근대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관광주의는 근대 도시에서 여가를 즐기는 중산층들이 “식민주의를 통해 연결된 다른 나라들을 방문, 문화적으로 소비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낚시하는 사람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 해초를 키워 수확하거나 채집하는 브르타뉴인들, 망고를 따는 타히티인들” 같은 비근대적인, 비도시적인 노동이 관광주의적 볼거리가 되는 것이다. ‘근대적’이라는 체험은 결국 ‘전근대적’인 것과의 비교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갱 스스로도 처음 타히티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실망한다. 그가 도착했던 곳은 번잡한 식민지 항구였을 뿐이다. 그는 보다 ‘원시적’이고 ‘순수한’ 곳을 찾아 섬 깊숙이 들어간다. 고갱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근대적인 사회와 문화에서 근원을 찾고자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관광객으로서의 예술가”가 된 것이다.

그리젤다 폴록의 책은 페미니즘 미술 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 좋은 실례다. 초창기 페미니즘적 미술사가들이 주로 잊혀졌던 여성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데 치중했다면, 폴록은 그것을 넘어 서양미술사 주요 작품에 드러나는 젠더·근대성·식민주의 등의 문제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유럽 중심적이고 남근중심적”인 문화에 정면으로 칼을 겨누었다. 이것은 과거를 폄하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일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억압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양자의 심리적 왜곡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가장 성숙한 일이며, 스스로가 해방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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