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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당시 영친왕의 생각으로는 부의황제를 만나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부의황제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대위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의 후손이요 자기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는데 이 두사람을 이목이 번다한 대판역두에서 일부러 만나게해서 그것을 대내·대외적으로 크게 선전하려는 일븐군부의 저의가 너무나 빤하게 들여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일반의 존경을 받는 「이옥전하」라고하더라도 또는 「사단장각하」 라고 하더라드「군」의 지상명령은 거역할 수가 없으므로 영친왕도 할수없이 부의황제를 맞이하러 대판역까지 나갔던 것이다. 그러면 일본차부에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세심하게 연출효과를 노리었던가?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1931년 9월18일저녁에 일본관동군의 음모로 소위「만주사변」이라는 것이 발생하자 이것을 본 국제연맹 (지금의 U.N전신) 에서는 즉시 이사회를 개최하고 영국의 「리튼」경을 수반으로 하는 이른바 「리튼」조사단을 편성하여 만주에 파견하는 한펀 일본과 중국에 대하여 즉시 전투행위의 중지를 귄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은 그치지를 않아 필경 전만주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공군이 화북의 금주까지 폭격하게 되니 세계의 여론은 비등하고 전중국은 북일항전의 도가니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중일전쟁이 오래 끌어오다가 대평양전쟁으로 발전되어 필경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거니와 「만주사변」으로 가장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랍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만주에서 살고있던 소위 「재민동포」였던 것이다.
재민동포의 수효는 약1백만명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넓으나 넓은 남북만주에 흩어져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이후에 조상전내의 토지를 빼앗기고 살 곳을 찾아서 만주로 흘러간 사람들로서 말하자면 무의 무탁한 유랑의 망국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부여 대해서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여 오던 중에 뜻하지 않은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보니 중간에 끼어서 애매한 피해를 당하는 것은 오직 힘없는 그들 뿐이었다.
즉 중국군은 만주의 조선인을 일제의 앞잡이라고하여 박해하고 일본군은 배일사상을 가진 부령선인이라고해서 압박하니 이러나 저러나 억울하게 희생되는 것은 그들 재만동포였던 것이다.
더우기 우스운 일은 사변이 점점 확대되어가자 일제는 판등군만으로는 병력이 부족하였던지 용산에 있던 제20사단의 조선군까지 만주로 출동시켰던 바 이소문을 들은 장학량의 중국군대는 「조선군」이라니까 조선사람으로된 군대로 오인해서 만주의 조선인농가는 닥치는대로 습격하여 나이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살상하는 참극도 많았었다.
그 반면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손아귀에 넣은 일제는 언제까지나 만주를 그대로 점령하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괴뢰정부를 만들어서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킬 결심을 하였으니 그것이 1934년에 탄생된 만주국이고, 그에 이용되어 만주국 황제로 등장한 사랍이 바로 천국에 망명중이던 선통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국」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목적이 소위 오족협화에 있었고 오족은 일계·만계·첩계·노계·선계등 만주에 거주하는 다섯인종의 민족을 가리킨 것으로 정작 조선안에서는 민족이 말살된 조선사람도 만주국에서는 어엿하게 국가구성의 일원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군부에서 영친왕으로 하여금 만주국 황제를 환영케 한 것은 만주국의 오족의 하나인 조선민족을 대표한다는 뜻도 포합되어 있었으니 그 점만은 영친왕도 해롭지 않케 생각하였었다.
그리하여 1940년 7월6일 오전 9시40분 대판역 「플랫폼」에서는 만주로 돌아가는 부의황제와 그를 마중나온 영친왕이 다 각기 다른 감회를 품고 오래오래 악수튤 교환하였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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