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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와 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7월14일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자 대한 제국의 말로를 재촉한 해아 밀사 사건의 일원인 이준 열사가 망국의 한을 품고 관사한지 63주년이 되는 날이다. 흔히 우리 겨레는 공의에 둔하고 용기가 적다는 평을 듣게 되나 이준 열사와 안중근 의사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위해 좋을 줄 안다.
해아 밀사 사건에 관련해 생각나는 것은 연전 작고한 일본 신문계의 원로이며 대 「아사히」 (조일) 신문 회장이었던 「다까이시」 (고석진오랑)라는 인물의 이름과 아울러 거의 40년 전 동경에 있을 때 그의 입을 통해 직접들은 밀사 사건의 삽화 한 토막이다.
해아에서 제2차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 1907년에 다까이시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중인 유학생으로서 「아사히」 신문의 유럽 주재 통신원의 직함을 띄고 있었다. 해아에서 평화 회의가 열리게 되자 백면서생인 「다까이시」는 본사의 명을 받고 현지 취재 차 개회 며칠을 앞두고 해아로 갔던 것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처음 간 곳이라 구경이나 할 셈으로 거리로 나와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면서 산책을 하다보니 어느 자그마한 「호텔」 문주에 난데없이 대한 제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쳐간 것이 있었다.
혹시 평화 회의에 대한 제국이 대표를 보내온 것이나 아닐까? 이보다 2년 전인 1905년에 이미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약취한 터이라 만의 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일은 일본으로서는 이만 저만 중대사가 아닌 것이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다까이시」는 탐색전을 벌인 끝에 과연 고종 황제가 파견한 사절단이 벌써 해아에 도래하여 암중 활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뉴스맨」으로서 이처럼 큰 「뉴스·소스」를 어떻게 놓칠 수 있을 것인가!
「다까이시」에 의하여 이 사실은 즉각 동경 본사에 타전되어 초 특종 기사로 「아사히」 신문에 보도됨과 동시에 외무성에 통보되어 경악한 외무성은 해아 현지 공사와 저들의 대표단을 시켜 맹렬한 방해 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재한 통감부의 이또 (이등) 통감으로 하여금 이일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협박하여 끝내 고종의 인책 양위라는 비극적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개의 유학생 「다까이시」의 이름은 일조 일본 전국에 알려지게 되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수훈의 보답으로 「아사히」에 중용 되어 그후 순풍에 돛을 단 듯 줄곧 순조로운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다까이시」는 출세하려면 운이 따라야 하고, 신문장이로 출세하려면 기자적 센스가 풍부해야 한다는 예화로 자기의 일을 자랑 삼아 털어놓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다까이시」의 앞지른 폭로가 아니더라도 이미 맹수의 독아에 걸려든 대한 제국의 운명에 큰 변화는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의 코는 아니지만, 일본의 외교적 조처가 시의를 잃어 밀 사단의 목적이 어느 정도 성공했더라면 구한말의 국면에 또 어떤 전변이 있었을는지 누가 알 것이냐는 가정에서 보아 일국의 망국의 악운을 자기 개인의 행운으로 마치 바꿔치기라도 하듯이 지껄여 대던 「다까이시」의 경망한 태도에 이가 갈리는 분통과 증악를 금할 길 없던 당시의 기억이 지금도 엊그제 일 같이 새롭다.
김성근 <서울대 사대 학장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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