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공의 대사교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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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련과 중공은 곧 대사를 교환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리라고 한다. 「모스크바」로부터의 보도는 중공이 소련서 임명한 「블라디미르·스테파코프」를 주북평대사로 받아들이는데 대해 「아그레망」을 보내오는 한편, 신임「모스크바」주재 중공대사로 유신권을 임명했으며, 또 소련은「레오니드·일리체프」 소련부외상을 북평에서 열리고있는 소-중공협상의 소련측 대표단장으로 임명했다고 전한다.
소련-중공간의 정식 대사 교환은, 중공의 문화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966년 양자가 서로들 대사를 철수함으로써 사실상 중단상태에 빠졌던 외교관계를 다시 정상화의 궤도에 올려놓게 됐음을 의미한다.
69년 여름 호지명 사망을 계기로 북평에서 소-중공 국경분규문제를 해결키 위해 소-중공협상이 열렸었는데, 이 회담은 이견대립의 노출로 중단-재개를 거듭하면서 현재까지 지속되어 왔었는데 쌍방이 협상을 파국에 몰아 넣지 않도록 인내깊이 노력한 결과가 소-중공간에 대사교환의 합의를 보게 뒨 것으로 짐작된다.
북평협상은 엄격한 비밀의 장막 속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진전상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협상진전이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것은 지난 수개월을 두고 소련-중공이 서로들 신랄한 비난·공격을 퍼붓고, 적대적인 의사를 감추지 앉고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50년대 말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소-중공대립은 처음 세계공산주의 전략을 싸도는 이념분규의 성격을 띠었다가, 다음에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있어서의 주도권다툼과 공산권내의 세력권적 대립으로 번졌고, 나중에는 소-중공간의 첨예한 「내셔널리즘」적 대립과 국경선에서의 부력충돌로 변모했다. 특히 69년에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집권태세를 갖춘 중공의 모-임파가 4월에 구전대회를 열어 소련의「수정주의」를 공식으로 적대한다는 선언을 채택했고, 소련 역시 격앙된 어조로써 중공의 적대 선언에 응수하는 한펀, 「모스크바」에 세계각국공산당대표들을 모아 가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중공을 파문·축출코자 책동한바 있었다.
위와 같은 소-중공대립의 전개과정이나 사적현실을 에누리없이 직시한다면, 소-중공간의 뿌리 깊은·대립이 수개월간의 협상으로 원만히 해결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중공간 대립을 이 이상더 확대하고 첨예화하여 국제반공 진영에 어부지리를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인식과 자각이 북평협상을 개최·지속시키고, 양자간 대화지속의 성과가 대사교환에 의한 외교관계정상화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시인을 아껴서는 안 될 사실이다. 소·중공간 대립의 유래는 매우 뿌리깊은 젓이다. 대립의 요소가운데는 부가화해의 성질의 것도 있으므로, 양자는 꾸준히 대화를 지속하면서 현실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붙잡고 합의에 도달하기 쉬운 문제부터 하나 하나씩 점진적으로 풀어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소-중공간의 냉전적 대립이 열전으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중공간의 전쟁을 조만 간에 필지적인 것으로 보고, 거기에다 공산권의 파괴나 파멸의 기대를 걸고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지나치게 희망적인 것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소-중공의 대립이 매우 심각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양자간 호양에 의한 평화공존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만한 정도로 유연한 국제정치감각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소-중공간의 외교관계정상화가 미·소·중공의 삼각관계나 소·중공·북괴의 삼각관계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주며 또 그것들이 남북한 관계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를 냉정히 검토하고 우리의 국가이익추구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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