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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평소에는 아무 말이 없고 웬만한 일은 다 순순히 양보하던 영친왕이 구라파여행에 한해서만은 그같이 강경히 주장하여 『누가 무어라 하더라도 나는 꼭 가고야 만다』는 태도를 보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표면상으로는 『이왕전하!』하고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나 실상인즉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중도 아니고 속한도 아닌 자기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던 때문이었다.
영친왕이 처음 일본에 왔을 때에는 나이도 어렸었지만 그저 아버님과 어머님이 그리웠을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차차 나이가 들고 주위환경에 익숙해감에 따라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되었다.
그중에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암살한 사건은 영친왕에게 비장한 충동을 주었으며, 생후 처음으로 국가의 독립이 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외교권을 빼앗고 해아밀사사건을 핑계 삼아서 억지로 고종황제를 양위케하고, 자기자신이 태자태사가 되어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간 장본인인데, 그가 암살되던 해에는 한국통감을 그만두고 추밀원의장으로 있었다.
이등은 명치유신의 일등공신으로 명치천황의 신임이 두터워서 소위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데 크나큰 공적을 남긴 사람인데, 그때에도 만주문제로 제정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크프를 만나고자 북만주 하르빈에 갔다가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었다. 1909년12월26일의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하르빈 역전에서 러시아의 의장병을 사열하려다가 안의사의 권총을 맞고 땅에 쓰러진 이등은 얼마후에 실날같은 목소리로 『범인은 누구냐?』고 묻고 옆에있던 사람이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하자, 이등은 입맛을 다시며 『흥! 미친놈』하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것을 가지고 어떤 일본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등박문은 합병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만일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합병이 안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며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명치유신후 일본의 헌법을 만들려고 구라파시찰을 하고온 이등이 독일의 연방제도를 본떠서 한국을 일본의 한 연방으로 만들려고 먼저 한국의 황태자를 인질로 데러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등이 만일 그때 죽지않았다면 혹은 합병이 다시 늦어졌을지는 모르나 연방이나 합병이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것이 그것이지 무엇이 다르리요.
그것은 어쨌든 영친왕에 대해서는 이등이도 극진하게 굴었었다. 자기가 태자태사가 된 책임감도 있었겠지만, 인천에서 일본 군함 만주환을 타고 시모노세끼(하관)에 상륙할 때까지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은것은 물론, 시모노세끼에서 동경으로 향하는 열차안에서도 마치 어버이가 자식이나 손자를 사랑하듯 다정하게 굴었다.
동경에 도착한 후에도 영친왕의 숙소인 시바(지)이궁을 자주 심방하여 때로는 쌍두마차에 나란히 앉아서 이곳 저곳을 구경도 다녔다. 그와같은 친절은 이등 한사람뿐만 아니라 명치천황도 마찬가지였으니, 천황이 몸소 영친왕의 숙소를 방문한 것은 물론 사흘이 멀다고 궁중으로 데려다가 좋은 음식도 대접하고 어떤 때는 천황이 차고있던 순금시계까지 선사하여 고독한 이방의 왕자를 달래기에 부심하였다.
그러므로 영친왕은, 그들의 속셈은 하여간 자기에 대한 호의만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등박문의 암살은 영친왕에게 비상한 충격을 준 동시에 처음으로 민족주의에 눈을 뜨는데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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