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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비소리] 오역 투성이 교양과학책 당장 리콜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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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근래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는 곳이 교양 과학서 시장이다.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 분야는 인기가 높다. 하지만 부실한 번역으로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문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붉은 여왕'(김영사, 김윤택 옮김)과 '루시의 유산'(한나, 한상희.윤지혜 옮김)을 꼽을 수 있다.

외국에서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저'로 이름을 떨친 책들이다. 하지만 번역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요령부득의 표현이 가득하다.

우선 지난해 출간된 '붉은 여왕'을 보자. 가장 큰 문제는 원서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71쪽을 보자. "…그후 진행의 4분의 3을 이 과정에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원문은 "…and then dispose of three quaters of the proceeds." 따라서 "결과의 4분의 3을 버린다"는 뜻이다.

저자의 원래 논지는 이렇다. "세포가 난자를 만들 때는 감수분열을 해 자기 염색체의 절반만을 전달한다. 그런데 감수분열 직전에 염색체수를 두배로 늘린다. 그리고는 원래 염색체의 절반만 난자에 집어넣는다. 굳이 두배로 늘린 다음 결과의 4분의3을 버리는 건 낭비가 아닌가?"

하지만 "버린다"를 "쓴다"로 반대로 옮긴 결과 전체 문맥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돼버렸다. 1백34쪽의 "훨씬 더 중대한 차이는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유전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도 마찬가지.

원문은 "A much more significant difference is that there are a few genes that come only from the mother". 그 뜻은 "어머니로부터만 오는 소수의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다.

저자는 이어서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 유전자가 두가지 성별이 생기게 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존재한다"를 "훨씬 적다"로 옮긴 탓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돼버렸다.

이같은 오역과 혼란은 번역본 도처에서 발견된다. '붉은 여왕'은 이른 시일 내에 개정판을 내는 것이 원저자에 대한 예의이자 독자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한편 이달에 나온 신간 '루시의 유산'은 '붉은 여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오역이 많다. 원저는 1999년 미국 출판협회의 전문학술 저작상을 받은 명저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암호책 같은 인상을 준다. "성은 아마도 두개의 연결된 세포에서 나온 핵물질이 함께 살아 남았을 때 육식성이 불완전해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61쪽) 여기서 '육식성'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다.

"유기체의 모든 계통은 자손을 키우는데 암컷만큼 노력하는 수컷이 있는 종을 칭찬한다. 역사적인 각주로서, 우리의 이름인 포유동물, 유방을 가진 생명체도 역시 불가피했다."(91쪽)

그뿐이 아니다. 저명한 학자의 이름도 엉터리다. 책에는 '토마스 말투스'란 이름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알고보니 그는 '인구론'의 저자인 토머스 맬서스였다.

결론적으로 '루시의 유산'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할 책이다. 물론 독자들에게는 리콜을 해줘야 할 것이다. 명저의 한국어 저작권을 독점한 출판사는 한국의 과학 대중에 대해 지적인 책임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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