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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심심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총을 쏜 10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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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들은 다만 따분했다. 그래서 총을 들고 나가 조깅하는 건장한 남자를 쏘아 맞혔다. 그를 알지 못했으니 원한도 없었다. 미국 유학 중이던 호주 야구선수의 꿈은, 심심한 일상에서 약간의 자극을 원했던 오클라호마주 10대 청소년 세 명에 의해 결딴났다.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뫼르소에게 죽임을 당했던 아랍인(카뮈, 『이방인』)처럼 타인의 권태가 이 호주 청년에겐 치명적 운명이었다. 며칠 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엽기적이지만 처음 보는 일인 양 놀랍진 않다. 심심해서 저질러지는 범죄가 낯설지 않아서다. 올봄 경기도 안양에선 버스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화학약품 세례를 받은 일도 있다. 10대들이 차를 몰고 버스정류장을 돌며 무차별 다수를 향해 저지른 범죄였다. 지난해엔 서울 강남 일대에서 난데없이 날아든 쇠구슬에 건물과 차량이 파손되기도 했다. 범인을 잡고 보니 모의총기와 비비탄·쇠구슬까지 갖춘 40대 남자였다. 이들은 모두 ‘심심해서 장난 삼아 해본 일’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폭력 가해자들 상당수도 “심심해서 재미 삼아 그랬다”고 한단다.

 이런 범죄가 느닷없는 일도 아니다. 검색해봤더니 1970년대 신문에서도 ‘심심해서 범행을…’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였다. 심심함·권태 등은 때로 보들레르가 ‘놈은 큰 몸짓도 고함도 없지만/기꺼이 대지를 부숴 조각을 내고/하품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니/그놈이 바로 권태’(‘악의 꽃’ 중에서)라고 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권태의 정체는 본래 괴물일까?

 요즘 유아동 교육전문가들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아이들이 심심할 틈이 없다’는 거다. 일부 학자는 ‘아이를 좀 심심하게 놔두라’고 설파한다. 창의와 창조의 시발점이 ‘심심함’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부족한 게 있으면 그걸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심심하면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찾아 상상하고, 주변 정보를 파악·정리하고 조합해 창조의 국면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심심하다는 게 얼마나 유익한 경험이며 삶의 활력소가 되는지 학구적으로 증명하는 책도 있다. (피터 투이, 『권태-그 창조적인 역사』, 미다스북스)

 한데 요즘 엄마들은 ‘심심한 시간’을 ‘버리는 시간’처럼 여겨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놀이·책·스마트폰으로 자극해 문제란다. 이는 아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빼앗는다. 가뜩이나 스마트 기기와 현대문화가 쏟아내는 자극이 넘치는데 ‘자극을 주는 교육’에 대한 강박증까지 보태지니 심심한 걸 죄악시하는 경향도 커진단다. 권태를 괴물이 되도록 몰아붙이는 건 이런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심심한 시간보다 더 재미있고 보람찬 건 없다. ‘심심하게 혼자 놀기’가 평생 취미인 내가 장담한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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