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우위 속에 회화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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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신과 기술이 잘 어울려서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다. 이때 정신은 내용이 되고, 기술은 형식이 된다. 따라서 내용은 훌륭한데 형식이 짜이지 않으면 예술로서 무가치하고, 반대로 형식은 훌륭한데 내용이 없으면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보면 이조시대에 태어나서 근대와 현대에 걸쳐 살고있는 이당 김은호화백은 과연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당의 작품세계는 기술의 고위 속에 회화를 형성한 테크니시언이다.
이당이 그의 고향인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화가가 되려고 발을 들여놓은 서화미술전은 1911년 이왕직의 뒷받침으로 4년제 미술교육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전통적인 기술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선생으로는 오원 장승업에게 배운 심전 안중식이나 소림 조석진 등이 있었고 동창생으로는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정제 오일제, 관제 이도영 등이 있었다. 특히 이당은 그의 사실적인 재질이 뛰어나 순종의 초상을 그리게 될 만큼 재현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일로 해서 이당은 도서서원 아닌 화가로서 이조 최후의 어용화사라는 영예를 지니게 된다. 이 기술에의 몰두와 집착이 결국은 이당의 작품세계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살아서 근대와 현대에 걸쳐있는 화인 김은호화백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의 모든 업적을 토대로 결산되어야 하겠지만 한가지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현대동양화 속에서 기교의 수준을 그만큼 끌고 왔다는 공적은 우선 인정해야 되리라고 믿는다.
물론 기술의 의미나 가치기준이 달라진 현대미술에서 그의 기술전통이 얼마나 발언권이 있고 지속되느냐는 것은 별문제지만 살아서 한국근대미술의 고전이 된 그의 인간적 성실과 화인으로서의 행적은 올바르게 평가되어야한다. [이경성(홍대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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