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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와 '원칙의 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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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파국 직전까지 갔던 남북관계다. 어떻게 보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까지 갔었다. 그런데 이 남북관계가 전기를 맞고 있는 느낌이다. 워낙 어려웠던 우여곡절을 겪은 뒤라 더 이상 악화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북한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고 기존 합의가 국익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 이것은 국제적인 관례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준수할 의사도 없으면서 합의에 서명이나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이런 행태를 너무 자주 되풀이해 왔다. 그래서 북한을 더 압박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북한을 움직인 것도 개성공단에 대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적’ 대응의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세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인 남북관계를 위해 우리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때가 됐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원칙적 대응 못지않게 분단극복을 위한 대승적 포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개성공단 정상운영을 어떤 경우에도 보장한다’는 북한의 입장은 우리가 받아낼 수 있는 ‘최대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북핵 위기가 아직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행태는 종래의 벼랑 끝 전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런 북한의 도발을 한 치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박근혜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다. 박 대통령이 원칙을 기조로 한 대북 강경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현실 때문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박 대통령은 ‘원칙(原則)의 여인(女人)’이다. ‘철(鐵)의 여인(女人)’인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롤 모델로 하고 있다. 대처는 박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 리더십’을 대처리즘이라고 말할 정도다.

 왜 박 대통령은 대처를 좋아하며,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일까. 분명 ‘작은 정부’나 ‘복지 감축’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보다는 현상(status quo)에 ‘수세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공세적으로 저항’하는 ‘철의 여인’의 ‘철의 의지’가 아닌가 싶다. 대처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더불어 소련의 위협에 공세적으로 저항한 반소(反蘇)투쟁의 화신(化身) 같은 존재였다.

 1976년 1월, 야당인 보수당의 당수였던 대처. ‘소련은…세계사에 전례 없는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소련 정치국의 인간들은 소련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군사적인 의미에서일 뿐 인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낙후된 국가일 뿐이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 연설로 소련 신문으로부터 ‘철의 여인’이라는 유명한 별칭을 얻었다.

 3년 후, 총리가 된 대처. 대소(對蘇) 강경자세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런 그녀가 1984년 2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우리의 귀를 의심할 ‘180도 방향전환’의 연설을 했다. “동(東)과 서(西)는 생활양식과 철학은 다르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같은 인류로서 공통의 미래를 공유하고 있다. 나를 ‘철의 여인’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긴장완화를 위한 ‘철의 의지’만은 확고한 사람이다”라고. 그리고 모스크바에 가서 말했다. 부다페스트를 거쳐 모스크바에 온 것은 결코 ‘변절이나 돌발적 충동 때문이 아니’라고. 소련과의 긴장완화를 위한 ‘철의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철의 여인’이 왔다고 말했다.

 철두철미한 반소(反蘇)주의자였던 대처. 하지만 그녀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국장(國葬) 조문을 기피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나 나카소네 일본 총리와는 달랐다. 조문을 위해 처음 가는 모스크바행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체르넨코 새 서기장과 회담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조문 파동으로 얼룩졌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방향전환이었다.

 박 대통령의 대북 강경자세는 여전해 보인다. 그래서 이런 박 대통령이 그녀의 롤 모델인 대처처럼 과연 남북관계 개선의 방향전환을 시도할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을 상식이 통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시키겠다는 박 대통령. 과연 ‘원칙의 여인’은 8·15 메시지에서 대처와 같은 확고한 방향전환의 ‘원칙 의지’를 표명할지 우리는 주시하고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