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저속성은 불가피한 속성|연기자의 조작부터 비난 받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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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TV란 무엇이냐?』
『Radio with eyestiain』(눈의 피곤을 주는「라디오」).
사실이 그렇다. 그 이상의 모는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한참 들여다보고 난뒤에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려고 오는 것이 TV의 매력이다.
영화나 연극이 일정한 시간안에 짜임새 있게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는 달리 TV는 3백만이라는 구멍을 통해서 무턱대고 이것저것 연속적으로 방출하는 불연속물로 마치 우리의 일상생활의 흐름과 흡사하다.
그래서 TV는 보는 사람과 피부를 같이하고 일상생활의 연결처럼 착각을 갖게 마련이고따라서 무의식간에 TV속으로 말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요즘의 「저널리즘」에서는 TV, 특히 「드라머」에 대한 「저속논쟁」이 흔히 나온다. 좀더 건전하고 고상한 예술성을 바라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드라머·라이터」로서 나는 TV에서 고상하다거나 예술적이라는 것을 아예 앞세울 생각은 없다.
왜? TV를 고상한 취미로 보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고상한 척하는 귀족취미는 TV의 생활에 맞지 않는다.
특히 극중에 나오는 인물이 꼭 우리생활주변에 흔히 볼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한 방안에서 같이 호흡하고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처럼 느껴지는데에 TV는 그만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저속하다』는 이 한마디는 하급동물인양 비난하는 투로 들리지만 사람은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누구나다 저속취미를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거다. 그것을 TV는 간지럽힐 따름이다.
역설 같지만 나는 그래서 어느 정도의 저속가치를 인정한다. 그렇다고 내자신 하급동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고상한척, 귀족적인 척 하는-「척」이 밉살스럽고 기만스럽게 느껴진다. 『저속이 싫거든 보지 말라.』이 한마디만 하고 싶을 따름이다.
『비속한 문학성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는 「헉슬리」의 말을 처들것도 없이 TV성(?) 에는 특히 어느정도의 저속의 정가를 풍겨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
다만 한가지 극중에서 지나치게 연기자가 마구 조작해서 풍기려는 저속은 삼가야만 한다. 그것은 건전한 웃음이나 맹랑을 주는 것 보다는 추악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서 혀를 차게 된다.
『저속하다』는 비난의 화살이 「드라머」자체보다도 대부분 극중인물의 추악한 행위를 집약한데서 퍼부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때 연출자나 연기자는 한번 자성해 볼 만하다.

<이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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