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열대의 밤바다…선상사육제|바다의 [귀부인] 무인도와는 실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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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토사들의 원시적인 배나 다름없는 [반카]를 타고 [사마르] 섬에서 [레이티] 섬에 건너올 때도 온통 물벼락을 맞아야했다. 이 [반카]란 통나무 배 같은 작은 [보트]로서 양쪽에 굵다란 참대를 세로로 달아서 뗏목처럼 뒤집히지 않게 했을 뿐 워낙 작고 보니 웬만한 파도에도 휩쓸렸다.
이 나라의 크고 작은 섬을 모두 합하면 무려 7천83개로 이 가운데 이름이 붙지 않은 이른바 무명도만도 2천4백41개나 된다. 설령 이름이 붙은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몇천개에 이른다고 하기에 이 [레이티] 섬에 머무르면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하얀 처녀지를 밟고 싶었다. 그래서 이 [레이티]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러섬 가운데서 무인도라고 생각되는 섬이 있지 않나 하고 밤늦게까지 지도를 펴놓고 조사해 보았다. 이곳의 지리를 잘안다는 원주민에게 물어 보았더니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마치 신부를 맞는 신랑의 가슴처럼 울렁거렸다. 그 무인도야 말로 정녕 의로운 [바다의 귀부인], 아니 누구보다도 청순한 성처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숲으로 만든 치마로 가린 [하와이]의 [훌라·댄서]처럼 아름다운 파란숲이란 의상을 걸치고 홀로 도사리고 앉은 그 무인도는 여행광인 나에겐 오직 하나의 [판도라] 이며 [비너스]임에랴.
그 무인도에 가기 위하여 바닷가엘 나가 [반카]의 뱃사공을 여기저기 틒아 보았다.
이 나라를 다니면서 강연이며 세계풍속 [슬라이드] 소개 따위로 번돈이 얼마 있어 배삯은좀 비싸더라도 기어이 [반카]를 구하려 했으나 뱃사공들은 한결같이 그 섬까지는 물결이 세어 갈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배를 구해서 내가 혼자라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보는데 이섬에서 사귄 어떤 신사는 그런 외딴 무인도에 [반카]로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면서 큰 배를 구해서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런 호화로운 여행은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선의 삯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아쉽게도 무인도 탐방은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도와의 실련의 쓰디쓴 눈물이라 할 이런 패배감을 안은채, 저녁 [민다나오] 섬으로 가는 [비서야스]란 화물선을 타기로 했다. 이 나라의 유명한 [아바카]삼 [코프러]를 잔뜩 실은선박인데 여객들은 모두 갑판위에 즐비하게 늘어 놓은 간역 침대위에 쉬게 되어 있었다. 복중이건만 서늘한 해풍이 불었으며, 해가지니 열대의 바다위의 하늘은 유독 짙푸르기만 했다. 갑판위는 마치 사육제처럼 떠들썩하고 흥청거렸다. 이 갑판위엔 많은 남녀들이 침대에 누워있었으며 속삭임들이 그대로 들려왔다. 홀아비는 이런데에 타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밤이 깊어지니까 젊은 남자들의 [러브·신]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발랑 누워서 진감색의 하늘을 우러르며 별과의 대화만을 나누었다. 천문학적인 까마득한 거리에 놓여 있는 별들이 이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열대위의 하늘의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을바라 보고 있노라니 <어디든 이국에 산다는 것은 그지없이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동경 즉 방랑과 향수에 대한 동경을 지니기 때문이다>란 저 독일철인 [짐멜]의 [팡세]가이밤 따라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직 [훔·시크]에 젖어 있을 수는 없다. 오늘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해두고 또한 내일의 설계도를 꾸며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이 나라의 여러 인종이 융화되지 못할 뿐 아니라 언어가 통일되지 못한 것은 [매스컴]이잘 안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나라가 거족적으로 대간선도로를 완성하려는 뜻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 [필리핀] 도시와 농촌은 모든 부문에 있어서 너무나도 차이가 심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쪽에는 일찍이 한민족, 남쪽은 13세기부터 [이슬램] 교도인 [모로] 족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 뒤에는 또 [스페인]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오만가지 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하다. 이렇듯 다원적이며 기형적인 정치며 문화를 바로 잡는데는 무엇보다도 교통이 큰 구실을 할 것인데, 이 나라의 교통은 도서국가이기 때문인지 해상교통은 얼마만큼 좋은 편이나 육지의 교통은 좋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교통이 편리해지면 부족의식은 국가의식으로 바뀔 것이며 방언도 줄어들 것이다. 어떻든 도로는 그 나라의 대동맥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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