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국가정보원 사태의 본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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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국가정보원의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대화록 원문 발견 실패와 사초 실종 논란, 사상 최초의 국정원 국정조사, 일반 시민과 야당의 촛불시위로 이어지며 사태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사태 초기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엄정한 기구개혁 다짐 정도의 언명이 있었으면 어렵지 않게 타협되고 해결됐을 사안으로 인한 불필요한 국력소모와 정쟁이 너무 지나치다.

 이번 사안의 본질은 간단하다.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국가정보기구가 최고책임자를 정점으로 국내정치에 불법 개입하고 국가경찰과 함께 진실을 은폐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간과 입헌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 범법행위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정부와 지도자의 정당성은 오직 합법적인 선거절차와 선출과정을 통해서만 확보된다. 절차적 정당성을 민주주의의 최소 필요조건으로 본 연유는 여기에 있다.

 만약 선진 민주국가에서 최고정보기관이 조직적인 불법 선거개입을 자행하고 국가경찰과 함께 은폐하였다면, 게다가 특정후보 진영에게만 비밀리에 국가기밀정보를 흘려 선거운동에 유리하게 활용하였다면, 정부 구성과 지도자 선출과정의 헌법적·법률적·절차적 흠결로 인해 탄핵소추와 헌법재판과 선거무효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헌법이론들이 깊이 고뇌하듯, 절차적 정당성과 헌법적 안정성 모두를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하는 현실에서 절차적 합법성 여부의 헌법적 재론문제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사과와 처벌, 재발방지와 기구개혁 같은 정치적 접근이 효율적인 이유이다.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자주 민주절차와 법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핵심 국가기구들을 불법적으로 정치목적에 동원한다. 4월혁명을 불러일으킨 경찰의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나 유신과 5공 시기의 정부-여당-정보기구-군-경찰 합동선거는 민주화 이전이라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화 이후 공개된 대형 사건만 보더라도 불법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

 1992년 대선의 이른바 초원복집사건의 참여자들은 시장-검찰-경찰-안기부(현 국정원)-군 정보기관-교육청의 현지 최고책임자들이었다.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주요 국가기구의 현지 최고수장들이 전부 연루됐던 것이다. 97년 대선의 세풍사건은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국세청을 광범하고도 조직적으로 불법 동원한 사건이었다.

 금번 국정원 사태의 본질은 초원복집사건, 세풍사건과 마찬가지로 국가기구가 불법적으로 민주정부 선출과정에 개입하여 주권과 헌정절차를 유린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피의기관의 수장이 국가이익과 기관이익을 혼동하여 국가기밀 내용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공개하고 반격한 행위 역시 전혀 옳지 않다.

 야당과 언론이 논란의 초점을 NLL문제로 몰아간 것도 잘못된 것이다. 특히 야당의 선택은 크게 틀렸다. 민주주의 이론들이 강조하듯 영토·안보·이념·주권을 둘러싼 논란에서 개혁세력이 보수세력에 대해 정치적 이익을 얻거나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단국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그들이 남북관계와 안보문제를 통해 정치경쟁과 선거에서 보수세력에 대해 승리와 우위를 추구했다면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차제에 우리 사회는 NLL문제에 대한 정도, 즉 사실에 바탕한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념 논란을 넘어 국민들의 이성적 이해, 보수-진보의 타협, 북한과의 협상, 국가이익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정확한 사실 획정과 성격 규정이 필수적이다. 즉 먼저 NLL에 관한 문헌적·역사적·국제법적 전거를 획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논란을 사실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필요하면 정부나 군의 주요기관과 학계가 합동조사를 통해 NLL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도 대안이다. NLL에 대한 미국의 문서들 역시 시대와 기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NLL설정의 당사자인 미국 정부와 군에 정본 자료를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정의롭지만 혼란한 사회와 정의롭지 않지만 질서 있는 사회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동기보다는 결과를, 도덕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를 옹호한 대표적 사유로 인용되는 문구다. 그러나 과정과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등장 이후의 표제는 ‘정의롭고 질서 있는 사회’로 바뀌었다. 국정원 사태와 NLL논란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한 두 필수가치인 ‘정의’와 ‘질서’의 기저에 정당한 절차와 객관적 사실이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을 웅변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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