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차명거래 전면 금지, 신중하게 추진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차명계좌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정치권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앞다퉈 발의하고 있다. 차명거래를 하면 형사처벌을 하고, 차명계좌의 실제 주인이 나타나도 반환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금융위원회 등 경제부처는 반대 입장이다.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할 경우 금융거래에 막대한 혼란과 지장을 주고, 선의의 범죄자를 양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우리는 양측의 주장에 모두 일리가 있다고 본다. 우선 차명거래의 전면 금지는 금융실명제법의 입법 취지에 부합한다. 20년 전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건 건전한 금융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부정부패의 소지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차명거래가 사실상 허용됨으로써 비자금 조성과 탈세, 자금 세탁, 횡령 등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자금 은닉과 탈세를 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차명거래 금지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는 상황이다.

 반면에 차명계좌를 폐지할 경우 선의(善意)의 범죄자가 양산되고 금융거래에 혼란이 일어난다는 경제부처의 우려 역시 타당하다. 부녀회비나 동호회, 곗돈 등의 계좌 명의를 개인으로 해놓은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 자녀 이름으로 예·적금을 들고, 부부가 공동으로 생활비 통장을 만들어 놓는 경우도 숱하다.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할 경우 이런 관행에 급제동이 걸리면서 상당한 부작용이 초래될 게 자명하다.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고 금고에 보관하는 ‘화폐 퇴장’의 가능성과 정책의 실효성 역시 우려된다. 20년 전 차명계좌를 폐지하지 않은 건 이런 부작용 때문이었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차명계좌 폐지에 속도 조절과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차명거래는 원칙적으론 금지돼야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혼란과 부작용을 줄이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차명거래 금지는 서둘러선 안 된다. 시간을 두고 충분히 검토하면서 적절한 보완책을 마련한 후 추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