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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민속음악의 정리에 반생…박헌봉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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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문화계의 응달에서 그를 뒷바라지하는 인사들은 세상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평생을 몸 바쳐오는이도 적지 않은데 그들은 비록 명예도 권세도 탐낼 줄 모르지만 오직 공헌을 하겠다는 긍지만으로 산다.
교정의 한 낮. 소년소녀들의 농악대가 귀를 째듯 풍물을 친다.
「다드래기굿」에서 다시 숨을 가다듬고「등맞이」「허튼굿」「요락굿』으로 가락이 한창 무르익자 소고쥔 소녀들은 나는 듯 뺑뺑이 치고 장구잡이 소년들은 엉덩이부터 들먹인다. 일본서 열리는「엑스포70」에 파견할 민속예술단의 농악연습 광경이다.
농악이 멎자 교실 여기저기에서 가지가지 국악기 소리가 두서없이 흘러나온다. 거문고· 가야금·피리·젓매·북…. 아무래도 귀가 따갑고 어수선한 국악예술학교이다.
이 특수한 학교를 혼자의 힘으로 이끌어 오는 박헌봉씨(64)는 반생을 국악 전승에 고스란히 바쳐온 숨은 공로자.
그는 결코 국악에 능한 기능자도 혹은 학자도 아니다. 다만 계승을 위한 매개의 역할로서만 족할 따름이다.
11년전에 중학과정의 학교를 세워 고생도 많이 했다지만 이제는 이 분야에서 국가대표 선수급의 학생을 적잖이 가졌고 총학생수 6백여명. 남이 돌보지 않는 민속음악을 스스로 천직 삼아 육성하고자 노력한 보람이 결실을 맺게된 셈이다. 이 학교야말로 민속음악에 둘도 없는 총 본산. 국립국악원에 국악사 양성소가 있지만 그 곳은 아악중심의 학교요, 또 경향에 연구소가 산재해 있지만 체계적인 교육기관은 못 된다.
국악의 개념이 잘못 혼돈돼 있다고 지적하는 박씨는『중국의 아악이 지금 국악의 전부인 것 처럼 인식돼 버려 온 국민이 함께 누리는 민속음악(향악)은 푸대접받으니 통탄할 일』이라고 거듭거듭 역설한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정악은 풍류(영장회상)·가곡·가사·시조. 속악으로 판소리(창악)·기악·민요·농악, 그밖에 탈춤놀이·꼭둑각시놀이 창극·무용. 그리고 아악은 국악의 한 작은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국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세의 산골소년으로 진주에 나가 가야금과 병창을 배울 때부터라 하지만 사실은 굿을 구경하다가 서당훈장한테 종아리 맞던 시절로 소급한다. 그의 기억으로는 9살때쯤. 지리산북록 산청군단성 태생인 그는『골짝꼴 산꼴짝에 줄기줄기 비 묻어온다』는 초동의 소리를 배우려 머슴아이의 지게를 뒤쫓아 다녔다.
일제때 중동학교를 마친 그는 다시 우리의 민속음악이 점차 소멸돼가자 진주로 가서 음률연구회를 창설했다. 삼현육각을 하는 사람 11명을 모아 후진양성에 나섰던 것이다. 나이 30이 다되어 서울로 올라와 국악을 가르치는 여러기관을 다녔다.
왕조말부터 전통을 잇고 있던 조선정악 연습소에서 가요등을 배우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과 풍류를 익혔으며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기악과 창을 연주했다.
박씨는 지금 쓰고 있는「국악」이라는 말이 그의 명명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해방전에는 있을 수 없는 말.
『시범적으로 행사를 크게 갖자니 번번이 빛 투성이었어요. 모든 비용을 정부나 재계인사들한테 신세지는 것이었는데, 빚값는 일은 더 큰 고역이었지요.』
박씨는 재단법인체의 학교를 설립하는데도 그것은 친지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국악 쫓아다니다 보니 한량이 될 밖에 없고 또 기방에도 익숙하기 마련. 그래서 이미 가산을 탕진했는데도 돈에도 명예도 욕심안내는 그의 성품을 아는 까닭에 지기들은 서슴없이 그의 국악육성욕을 북돋워준 것이다.
그는 심한 수두병과 속병으로 온몸에 노환이 깃들여 있다. 후진들은 걱정하다 못해 4년 전 정릉에 3간집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여생을 몸담을 집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에 있다.
남산교사에 쫒겨나 지금은 국립국악원 자리를 빌어 쓰고 있는데 역시 남의 건물. 석관동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나갈 것이 태산같은 걱정이요 꿈이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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