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지출 허리 휘는 미국, 시카고도 21조원 모자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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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 디트로이트시 소방관들이 지난달 24일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법원에선 시의 회생 방안이 논의됐다. [디트로이트 AP=뉴시스]

미국 중부도시 디트로이트에 사는 수전 하이터(65·여)는 시 소속 청소차를 운전하고 있다. 그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앞으로 내가 받아야 할 연금의 4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억울하고 비참한 심경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이터는 은퇴 후 계획을 송두리째 뒤바꿔야 한다는 현실에도 망연자실하고 있다. “원래는 자원봉사를 하며 노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맥도날드 매장의 일자리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디트로이트에서 공원 관리인으로 9년째 일해온 욜란다 와이체(여)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연금 혜택을 받기도 전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봉급이 20% 깎인 와이체는 “공원관리국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와이체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정든 도시 디트로이트를 떠나야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이 전한 디트로이트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디트로이트는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챕터 9’이라고 불리는 연방파산법 9장에 따라 미시간주 연방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185억 달러(약 21조원)의 부채를 갚지 못해서다. 도시가 파산했다는 건 남의 일이 아니다. 그 도시에 사는 시민들의 보통 삶을 곧바로 깊고 어두운 그늘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의 가로등 중 40%는 밤이 돼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시 소유의 앰뷸런스 중 3분의 2는 운행 중단 상태다. 급한 일이 있어 경찰서에 전화했을 때 평균 응답시간이 58분(미국 전체 평균은 11분)이라는 통계는 또 어떤가.

재정 상태 나은 도시로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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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지인 디트로이트뉴스에 따르면 전체 시민 중 절반 이상이 재산세를 내지 않는다. 연평균 가구당 소득도 2만5193달러(약 2829만원, 2011년 기준)로, 미국 30대 도시 중 최하를 기록하고 있다. 시 재정이 점점 고갈될 수밖에 없다. 1950년 자동차 산업의 부흥과 함께 중서부 최대 도시로 185만여 명이 몰려 살던 디트로이트는 지금 거주인구가 7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최근 10년간 25만 명이 디트로이트를 떠났다. 파산 신청을 한 만큼 재정상태가 더 나은 도시로 이주하려는 엑소더스 행렬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문제는 최강국 미국에서 파산 위기에 처한 도시가 디트로이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파산보호 신청을 한 직후 데이브 빙 디트로이트 시장은 “도미노는 시작됐다. 쓰러지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26일 ‘파산 관련 요주의 도시’ 9곳을 선정해 시 재정상태를 정밀 실사 중이다. 리스트는 중부 최대도시인 시카고에서부터 동부 광업·화학도시인 찰스턴까지 미 전역에 퍼져 있다. <그래픽 참조>

 그뿐 아니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퓨리서치센터는 연방 인구·노동국 통계를 인용해 캘리포니아주의 프레스노, 네바다주의 노스라스베이거스,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 앨라배마주의 버밍햄,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 등 5개 시를 디트로이트에 필적하는 재정 위기의 도시로 꼽았다. 월가의 족집게 애널리스트로 불리는 매리디스 휘트니는 23일자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디트로이트 파산 사태가 비슷한 처지의 다른 도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클 것”이라며 지방채 부도가 잇따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0년 이후 파산신청 36곳 달해

 1934년 미국 지방자치단체의 파산 및 회생 절차를 담은 연방파산법 9장이 제정된 뒤 2008년까지 파산 신청을 한 도시는 600개가 채 안 된다. 반면 2010년 이후 파산 신청을 한 곳은 36곳에 달한다. 파산 도미노가 주로 최근의 일이라는 의미다. 주별로는 네브래스카가 10개로 가장 많고, 캘리포니아·텍사스의 순이다.

 미국의 도시들은 왜 파산하는가. 연방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파산 도시의 공통점은 시가 벌어들이는 소득과 비교할 때 연금 등 재정지출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안일한 경영, 방만한 재정이 문제였다.

 지난해 6월 파산보호를 신청한 캘리포니아주의 스톡턴의 경우 부실 재정에 더해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시 재정이 바닥났다. 같은 해 앨라배마주 제퍼슨카운티는 시 재정상태를 감안하지 않고 대대적인 하수도 정비사업을 하며 발행한 지방채 30억 달러를 해결하지 못해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캘리포니아주의 오렌지카운티 역시 카운티 재무부가 지방채를 발행해 막대한 투자사업을 벌였다가 이자율이 급등해 재정 고갈을 맞았다.

 디트로이트처럼 미국 경제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한 경우도 적지 않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3사가 일본 수입차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시 세입이 줄면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자동차 산업의 쇠퇴는 퇴직자를 양산해 연금 대상자가 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무원 노조는 임금 인상을 가속해 ‘연금·임금 인상→부채 증가→이자율 상승→재정 악화’ 등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현재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18%대로 미국 평균 7.6%의 두 배 이상이다. 퇴직자 대비 근로자 비율은 무려 2대 1에 달한다. 일하는 사람보다 연금 수혜자가 더 많으니 견뎌낼 재간이 없는 셈이다.

디트로이트, 퇴직자가 근로자 2배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이제 미국의 도시들은 유리한 경쟁자원을 상실할 때 어떻게 바뀐 변화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가 경쟁력을 잃었을 때 신속하게 대체 가능한 수입원을 찾는 노력이 재정 악화를 막을 수 있는 만큼 지자체 경영의 기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의미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챕터(chapter) 9 미국 지방자치단체의 파산절차를 규정한 연방 파산법 9장. 대공황 시절에 만들어졌다. 기업이나 개인의 파산절차를 규정한 11장 등과 달리 판사의 재량권이 적다. 판사가 기업·개인에게 하는 것처럼 자산 매각 등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지시할 수 없다. 지자체가 자구계획을 세워 파산 상태를 벗어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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