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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항미원조'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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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비자를 받기 위해 베이징 미국대사관 앞에 선 줄은 오늘도 200m씩 이어진다. 뙤약볕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 생기발랄한 청춘 남녀들은 아이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 보내며 곧 있을 미국행에 들떠 있는 모습이다. 미국대사관 양쪽으로 각각 100m 거리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엔 우유를 듬뿍 넣은 중국식 ‘아이스 라톄(拉鐵·라테)’ 주문이 쏟아진다.

 이렇게 미국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업의 제품을 스스럼없이 소비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반미(反美)나 항미(抗美)의 기색은 찾아보기 어렵다. 친미까지는 아니지만 문화·정서적으로 미국이 친숙하고 동경하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1980~90년대 한 자녀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영·유아 용품으로 길러지고 미키마우스를 보며 컸으며 형편이 웬만하면 방학 때 아시아나 여객기를 타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는 세대다. 신장된 국력에 뿌듯해하고 강한 자국 통화의 위력을 맛보면서 말과 표정에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는 중국판 ‘신인류’다.

 정전 60주년을 보는 시각도 기성세대의 기대와 다르다. 국제 정세를 냉철히 반영한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엔 “조선전쟁(6·25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대만을 해방시킬 결정적 호기를 놓쳤다” “미국 대통령의 방중이 20년은 빨라졌을 것” “더 일찍 개혁·개방할 수 있었는데 스탈린의 냉전 구도에 휘말리는 우를 범했다”고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를 성토했다. 60년의 세월이 그냥 흐른 것은 아닌 모양이다. 노병이 사라지고 있고 중국을 이끄는 동력으로 신세대가 부상했다. 6억 명에 이르는 중국 네티즌의 여론은 낭만적인 북·중 혈맹의 기억에 도취되지 않는다. 덮어놓고 감싸 안는 전통적 우의 관계가 아닌 국익 기준으로 지정학적 가치와 이익을 따지는 정상 국가 관계가 이제 북·중의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의 대미 전략인 ‘신형대국 관계’는 미국과 상호 존중과 협력을 지향한다. 항미를 전면에 내세울 시대가 아닌 것이다. 이로 인해 피아(彼我) 구별이 선명한 항미원조 대신 가치중립적인 조선전쟁이 중국 당국의 공식 용어가 될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 한반도 사안에 정통한 중국의 한 국제정치학 교수는 “대놓고 항미원조 용어를 쓰는 행사는 앞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북한을 돕는 중국의 항미원조 정서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 접어들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초입이다. 동북아에서는 명실상부한 G2(미국·중국)가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선 안 되는 이유다. 대한민국 외교안보팀의 분발이 절실한 정전 60주년 여름이다.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