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흐루시초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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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64년 10월13일. 「모스크바」는 이날 온통 축제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코마로프」 대령, 「페오크티스토프」 기사, 「예고로프」 의사를 태운 세계 최초의 3인승 인공위성이 24시간17분의 궤도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17일에는 이들에게 거국적인 환영대회를 베풀려고 「모스크바」는 준비에 부산했다. 그런데 「크렘린」붉은광장 환영대에 의당 높이 치솟아 있어야할 「흐루시초프」의 초상화가 보이지 않았다. 흑해 「소치」별장에서 휴양중인 「흐루시초프」는 바로 12일에 3인승 위성이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코마로프」대령과 전화를 통해 그의 익살맞은 축사를 보냈고, 이 사실은 「프라우다」에 대서특필 보도됐던 것이다.
무대는 바뀌어서 10월13일과 14일에 「흐루시초프」 참석 없이 열린 소련의 국가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당중앙위원회(1백35명)와 최고회의간부회(정회원 14명, 후보의원 7명)회의 분위기는 일반시민의 들뜬 기분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심각했다. 「크렘린」의 이론가 「수슬로프」가 우선 간부회의에서 「흐루시초프」 규탄과 해임안을 제출, 열띤 논의 끝에 동의를 얻었고, 이어 긴급소집된 당중앙위원회에서도 가결을 보았다.
10월15일, 「타스」통신에는 『「흐루시초프」가 고령과 건강악화로 사임했으며 당제일서기에는 「브레즈네프」가, 그리고 수상에는「코시긴」이 임명됐다』는 짤막한 보도가 나왔다.
이로써 11년 동안 「크렘린」권좌에 앉아 아마 근대사상 소련과 그리고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흐루시초프」는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흐루시초프」를 가리켜 흔히 『가장 매력 있는 심술궂은 20세기의 괴물』이라고 부른다. 교조적인 공산국가지도자 중에서 그만큼 개방적이고 익살맞고, 다혈질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의 실각이유 중의 하나로 꼽히는 국제외교무대에서의 괴태(?)는 부지기수였다. 「유엔」총회장에서 느닷없이 구두를 벗어 책상을 치고, 영 여왕에게는 산 새끼 곰을 선물하고, 「뉴요크」의 공식연설에서는 자본주의에 신의 가호있기를 빌고, 어떤 「리셉션」에서는「샴페인」을 열한잔이나 마시는 등등….
그러나 「우크라이나」옆의 「그로스크」에서 태어나 23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고 권력의 정상에 오른 「흐루시초프」의 다른 한 얼굴에는 냉혹·치밀·열정·술수·자신의 총화가 어른거렸다. 「스탈린」생전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것도 비범하려니와 사후 「말렌코프」 「몰로토프」 「베리야」 「불가닌」 「주코프」를 차례차례 밀어내고 권력제일인자에 오르기까지의 투쟁과 수법은 정말 비상했다. 「흐루시초프」의 정치생애는 1956년2월의 제20회 당대회 때의 6시간에 걸친 「스탈린」격하연설과 61년10월의 「스탈린」상 말살「캠페인」으로 숙정과 대단원을 이루었다.
「흐루시초프」 실각 이유로서 농정실패이니, 앞서 말한 국제외교무대에서의 빈번한 추태연출이니, 또는 사위 「아주베이」를 중용한 족벌정치 탓이니 등 견해가 구구하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생각해서 공산주의도 그 나름대로 진화과정을 겪고 있다고 본다면, 최악의 시대인 「스탈린」 주의로부터 현 「기술당료」 집단지배에 이르기까지의 과도기가 끝났다는 의미인 것이다.
현재 「흐루시초프」(75)는 「모스크바」에서 40㎞ 떨어진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연금으로 쓸쓸히 살고 있다. 무료를 잊기 위해 낚시와 독서로 소일하다가 요즘은 「도마도」의 수경재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심통이 나면 「도마도」재배판을 때려부수고 새로 만든다고 한다. 일반에 모습을 보이는 날은 투표할 때 뿐이다. <박경목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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