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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헬렌 토머스 93세로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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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헬렌 토머스가 백악관 브리핑룸 맨 앞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 오랜 투병 끝에 백악관으로 돌아온 2008년 11월 11일 찍은 사진이다. 케네디부터 오바마 대통령까지 10명의 미 대통령을 취재한 토머스에겐 그만의 지정석이 있었다. [로이터=뉴스1]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겐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베트남 전쟁을 끝낼 비책이 도대체 뭡니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겐 이렇게 물었다. “미국이 그라나다를 침략할 수 있는 권리가 대체 뭡니까.”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도 국방예산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이제 미국의 적은 누굽니까”라고 물었다.

 미국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로 불려온 여성 언론인 헬렌 토머스가 20일(현지시간) 워싱턴 자택에서 별세했다. 93세. 정확한 사인은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토머스는 오랜 기간 신장질환으로 투석을 받아왔다.

 그녀의 죽음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헬렌 토머스는 여성 언론인의 벽을 허문 진정한 개척자”라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레바논 이민 2세인 토머스는 1920년 8월 4일 켄터키주 윈체스터시에서 가난한 야채상의 딸로 태어났다. 주유소·도서관 아르바이트 등으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마쳤다. 고등학교 때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웨인 주립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42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워싱턴 데일리 뉴스에서 잠시 복사공으로 지내다 43년 UPI통신에서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의 35~44대 대통령 10명을 취재한 헬렌 토머스가 재임중인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들. 왼쪽부터 1963년 존 F 케네디, 71년 리처드 닉슨, 79년 지미 카터, 95년 빌 클린턴, 2006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했을 때다. 맨 오른쪽 사진은 2009년 백악관 브리핑 룸에서 열린 오바마 대통령 생일 파티 행사 중 찍었다. [AP·로이터=뉴시스·뉴스1]▷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60여 년의 기자생활 중 50년 가까이 백악관을 출입하며 존 F 케네디 대통령에서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했다. 기자로서 토머스는 집요했고, 직업정신이 투철했다. 2006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토머스는 “대통령이란 자리를 존경하지만 국민의 공복(公僕)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권력자들과의 마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91년 걸프전 발발 직전 토머스는 부시 대통령에게 “군사공격이 언제 시작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부시 대통령이 “헬렌, 오늘은 어딘가 언짢아보이는데, 기운 좀 내시지 그래”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특히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대통령과는 불과 물의 관계였다. 2003년 토머스가 동료기자에게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취재하고 있다”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화가 난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기자회견에 토머스를 3년 동안이나 참석시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기자회견에 참석한 토머스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대뜸 “당신이 전쟁을 원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 석유냐 이스라엘이냐”고 물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미 언론사에서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최초의 여성 기자클럽 멤버, 주요 통신사 중 최초의 여성 백악관 출입기자, 중견언론인 모임 그리다이언 클럽(Gridiron Club)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 백악관 기자협회 최초 여성 회장 등등.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토머스를 유명하게 만든 건 1960년대 초부터 백악관 브리핑룸의 맨 앞줄에 앉아 대통령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은 일이었다. 한때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열린 대통령 기자회견은 토머스의 인사말로 시작해 “감사합니다. 대통령님(Thank you. Mr. President)”이라는 토머스의 인사말로 끝났다.

 레바논계여서인지 토머스는 이스라엘에 공격적이었다. 201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린 유대인 행사 때 만난 랍비에게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원래 있던) 폴란드나 독일로 가야 한다”고 한 게 문제가 돼 결국 기자직을 그만뒀다. 사생활은 기자생활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71년 라이벌 언론사인 AP통신 백악관 출입기자 더글러스 코넬과 결혼했으나 11년 뒤 사별했다. 자녀는 없다. 토머스의 사망 소식에 CBS의 전 앵커 댄 래더는 “언론계의 영웅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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