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책임총리제로 가는 첫걸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한국 정치의 혼란은 상당 부분 '대통령 무책임제'에서 비롯됐다고 이미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권한은 많고 책임은 질 수 없는, 대통령 한 사람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해 온 반세기의 관행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가는 더 이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총리 인준 청문회와 대통령 취임식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 더 미룰수 없는 정치개혁

참여의 정부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미 관계의 건설적 재조정이 초미의 국가적 과제로 부여됐다. 그러나 이 중대한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정치와 경제의 건강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따른 치료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국민적 합의와 결단이 앞서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국민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국제적 경쟁과 협상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단 말인가.

외환위기를 가져 왔던 5년 전 '우리 경제 이대로는 안된다'는 국민적 합의가 단숨에 조성돼 광범위한 경제구조 개혁의 시발점이 됐었다. 2002년 6월 월드컵 4강 진출로부터 12월 대선에 이르는 반년 동안에 또 한번 조성된 국민적 합의는 '우리 정치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상황이 심각하더라도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바람을 더 이상 지연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개혁은, 특히 급진적 개혁은 국민적 합의보다 오히려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민 모두가 정치개혁이란 총론적 목표에는 동의하고 있으나 무엇을 어떤 순서와 속도로 어떻게 개혁할 것이냐 하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집단과 계층 및 여러 갈래의 이익과 입장의 차이로 인해 갈라지고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합의된 개혁의 명분으로 국민을 설득해 서로 상반된 갈등관계의 조화를 시도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정도(正道)다. '개혁을 위한 타협'이란 일견 모순된 전략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지혜인 것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여야 후보가 같은 목소리로 국민에게 공약한 정치개혁의 하나는 책임총리제를 실행해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단을 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여야가 똑같이 한 약속이기에 책임총리제 개혁은 정치적 쟁점이 될 여지가 없으며, 헌법에 명시된 사항을 법대로 집행하겠다는 명분으로 국민적 동의를 얻는 데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개혁 추진의 첫걸음이 돼 '개혁을 위한 타협'의 막을 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이번주에 있을 총리 인준 청문회는 과거와는 다른 의의와 중요성을 갖게 된다.

정부의 국정처리 능력은 유지.향상시키면서 국민에 대한 책임과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제도화하는 대통령제 개혁의 첫 시도가 돼야 한다. 내각이, 그리고 국무회의가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는 정상화가 이뤄지기 위한 국무총리의 헌법적 권한, 특히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이 분명히 확립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지난 몇주 국무위원 인선에 관한 갖가지 풍문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작 총리지명자의 뜻은 널리 퍼진 무관심 속에 파묻힌 듯싶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대통령당선자와 국회의 각별한 관심을 기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국내외 신뢰 받는 내각을

대통령은 나라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국가 신인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내각의 얼굴들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국민의 믿음을 얻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으며, 세계 시장에서의 평가를 높이는 데는 어떤 인물들이 내각에 포진하느냐에 따라 성패의 관건이 될 수 있다.

대통령과 내각과 국회가 지혜를 모아 당면한 위기를 극복해 주기를 국민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번 총리 인준 청문회와 대통령 취임식이 바로 그러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계기의 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