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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관계 새로 쓴 남양유업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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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구희령
경제부문 기자

‘갑의 횡포와 을의 눈물’을 사회에 화두로 던졌던 남양유업 사태가 두 달여 만에 일단락됐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중림동 LW컨벤션 기자회견장. 지난 5월 9일 남양유업 김웅 대표가 임직원과 함께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며 깊이 고개를 숙였던 장소다. 영업직원의 막말과 물량 밀어내기가 온라인을 통해 논란이 된 지 6일 만에 남양유업은 대국민 사과를 했었다.

 그리고 두 달여 뒤인 이날 김 대표 옆에는 ‘갑의 횡포’ 문제를 제기했던 전직 대리점주들을 대표하는 이창섭 회장이 섰다. 이 회장은 자신을 “남양유업 대리점협의회 회장”이라고 소개했다. 기존의 ‘피해대리점협의회’라는 명칭에서 ‘피해’라는 단어가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기자회견장에 나타나기까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 ‘갑을’ 문제를 제기했던 전직 대리점주들과의 협상은 10여 차례를 거듭해도 끝나지 않았다. “남양유업 불매운동이 확산되면서 큰 피해를 봤다”며 나중에 문제를 제기한 현직 대리점주들이 지난달 회사와 협상을 마무리한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합의가 이뤄졌다.

 18일 새벽 극적으로 타결된 뒤 기자회견 현장에 배포된 양측의 ‘상생협약안’에는 그동안의 갈등과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회사는 물건 발주·출고전산시스템에 대리점주들이 오후 1시까지 발주 내역을 입력할 수 있도록 하고 대리점주 외에는 이후 변경할 수 없도록 한다’ ‘3·6·9·12월 둘째 주 수요일 오후 2시에 회사 본사 사무실에서 상생위원회 회의를 연다’는 등 지나치리만큼 구체적이다. 전직 대리점주들에게 다시 대리점을 열 권리를 주면서 계약 기간과 조건 등도 자세히 명시했다. 피해액 산정도 개별 합의가 아니라 세 명(회사 측, 대리점주 측, 양측이 동의한 제3자 각 한 명)으로 구성된 배상중재기구를 통해 진행하도록 했다. 물량 밀어내기 피해 기간, 피해액 산정 기준, 배상금 지연 시 12~18%의 지연손해금 추가 지급 등도 꼼꼼하게 규정했다. ‘갑의 시혜’나 ‘을의 양보’에 기대지 않고 양측이 철저하게 시스템에 의해 향후 관계를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번 양측 합의는 서로를 이해하는 갑을 관계 재정립의 신호탄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다시는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회사와 대리점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여야 하는 수평적 동반자 관계임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는 공동선언문에서도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물리적 행동이나 거액의 보상금 대신 구체적 합의문을 해결책으로 선택한 양측의 노력이 향후 우리 사회 갑을관계의 모범답안이 되길 기대해 본다.

구희령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