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방위법 정당한가 … 미국 시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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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비무장한 10대 흑인 청소년 트레이번 마틴 살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정당방위법(Stand-your-ground law)이 도마에 올랐다. 트레이번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히스패닉계 청년 조지 지머먼이 이 법에 따라 무죄 평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익 라디오 방송 NPR을 비롯한 미국 언론은 16일(현지시간) 이 법이 플로리다주의 정당방위법 ‘망령’을 되살리고 있다고 전했다.

 플로리다주는 2005년 강력한 정당방위법을 도입했다. 자택 밖에서도 신체적 위해 없이 심리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면 총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골자다. 인권단체는 강력 반발했다. 총기 사용 범위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넓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보수 색채가 강했던 플로리다주에선 이 같은 여론이 묵살됐다. 플로리다주에 이어 30개 보수적 주정부가 비슷한 정당방위법을 도입했다.

 애초 강력 범죄를 예방하자는 취지와 달리 이 법은 흑인에게 불리한 인종차별적 성향을 띠게 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2005년 이후 4년간 흑인을 사살한 백인에게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비율은 34%인 데 반해 백인을 사살한 흑인의 구제 비율은 3.3%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번 역시 후드티를 입고 밤거리를 걸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용의자로 지목돼 지머먼의 추격을 받았다.

 에릭 홀더 미 법무장관도 정당방위법을 제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법무장관인 그는 미국 최대 흑인권익단체인 전미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연례회의에서 “폭력을 방지하기보단 오히려 폭력을 일으키는 법이라면 철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 연방정부 산하 민권위원회는 지난 6월부터 피부색이 정당방위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한편 지머먼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흑인 시위는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북부 오클랜드와 남부 로스앤젤레스(LA)에선 밤사이 시위대가 폭도로 돌변해 경찰을 긴장시켰다. 오클랜드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주민 가운데 흑인 비중이 가장 큰 도시이고 로스앤젤레스는 1965년 이른바 와츠 폭동과 92년 로드니 킹 구타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 폭동 등 두 차례 대규모 인종 폭동을 겪은 바 있다.

 시위대 일부는 거리로 뛰쳐나와 가게 유리창을 부수고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오클랜드에서는 10대를 포함해 적어도 9명이 경찰에 공격용 무기 소지와 공무 집행 방해, 재물 손괴 혐의로 체포됐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6명의 청소년을 포함해 14명이 구금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150명가량이 평화적인 시위 대열에서 벗어나 시내 중심가로 진출해 불을 지르고 창문을 깨는 난동을 부렸다. 특히 한인 상점이 폭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시위에 참가했던 추아테목 네그레테(22)는 “시위대 일부가 돈을 뺏고 위협해 겁났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말했다. 한 목격자는 폭도들이 가게 안에 들이닥쳐 상품을 마구 밖으로 내던졌고 일부는 보석 가게 진열장 유리를 깨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도 봉변을 당했다. CBS 로컬 채널 데이브 브라이언과 ABC 로컬 방송 영상 기자는 누군가가 뒷머리를 때리고 달아나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카메라에 포착된 화면에는 2명의 괴한이 어둠 속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클랜드에서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도심을 행진하다 한때 고속도로까지 진출하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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