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메고 파주 왔었는데 … 그때 적이 이젠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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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군 출신 량덩가오(왼쪽)와 천뤄비가 10일 오후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자신들의 기사가 실린 중앙일보를 선물받고 즐거워하고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신문은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회장이 본지 1면 사진을 보여주며 “바로 여러분”이라고 말하자 이들이 “기념으로 갖고 싶다”고 말해 전달됐다. [김경빈 기자]
천뤄비가 1953년 정전협정 직후 북측 비무장지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김경빈 기자]

‘중국군 여병사’.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여군 천뤄비(陳若必·81)는 지금까지도 이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16군 간부실에서 근무하며 사진 촬영을 맡았던 그는 철원의 상감령(上甘嶺) 전투 현장 등 틈틈이 찍은 50여 장의 기록을 사진첩에 담았다. 한국군이 파로호를 한국전쟁의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기억한다면 상감령은 중국이 ‘6·25전쟁의 성지(聖地)’로 여기는 곳이다. 상감령은 북한 최고 지도자들이 가끔 방문하는 오성산(1062m) 남쪽, 한국이 저격능선(580m)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김화지구 능선 바로 옆에 있는 고개다.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모두 정말 기뻐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총 메고 파주에 왔었는데 이제는 중국과 한국이 다들 친구가 됐다.”

 그는 종전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천은 1955년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세월은 60년을 넘어섰지만 천의 사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다. 50점의 사진에는 전쟁 상황과 상감령 전투 현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등이 담겼다. 중국 여군 전우와의 기념사진도 보인다. 한·중문화협회와 함께 이들을 초청한 경기도는 전쟁 사료로서 가치를 높게 사 천의 사진첩 복제를 요청했다. 1953년 초 참전한 천은 그해 7월 정전된 후에도 북한에 남아 2년간 복구사업을 도왔다. 함께 참전한 여군은 10여 명으로 극소수였다

 한국전쟁에 자원했던 량덩가오(梁登高·78)는 한국전쟁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박격포탄이 날아다니고 사방은 회색 연기로 뿌옇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가 확보될 때쯤이면 뒹구는 시체들이 보였다. 1년 늦게 입대한 친구가 먼저 사그라져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참혹’이란 단어 외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천뤄비(앞에서 둘째)가 1953년 정전협정 직후 북측 비무장지대(DMZ) 인근 참호에서 동료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천뤄비]

 51년 7월 입대해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량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57년까지 북한에 남아 신병들을 가르치는 교관을 지냈다. 그는 이후 주택건설국 이빈(宜賓)시 당서기까지 역임한 골수 공산당원이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 따위는 없다. 젊은이들끼리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총을 겨눠야 했던 비극적인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량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추억하듯 손끝으로 과거 전우들을 되새겼다. 그는 “어제 한국의 노병사들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겠다. 말 그대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아픈 역사는 지나갔고 이제 중·한 모두 평화를 원한다”며 “남북 관계도 다시 회복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량은 60년 만에 찾은 한국이 마냥 신기한 듯했다. 그는 “총대를 메고 파주 마장리까지 와 보긴 했지만 이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서울 땅을 밟게 될 줄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10일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52년 운전병으로 참전한 라이쉐셴(賴學賢·85)은 전사자명비 앞에 서서 한참을 떠날 줄 몰랐다. 최고령인 라이는 53년 정전협정이 연장되면서 그해 봄 최후의 대규모 군사작전인 춘반등륙작전과 하계반격전투에 참여했다. 라이는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총을 겨누던 사이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남북은 지금도 하나였을 것”이라며 “조속히 평화 통일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의도의 한 삼계탕집에서 이뤄진 점심식사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천뤄비는 “한·중 수교가 이뤄지던 92년부터 꼭 한 번 한국에 와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꿈이 실현됐다”며 “감사합니다”라는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인삼주 건배사를 제안했다. 천은 “20년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도 공군 출신이었다”며 “제대 후 초등학교 수학 교사로 시작했는데 군 출신의 운동신경을 못 속여 이후 체육을 담당하게 됐다”고 했다. 량덩가오도 “맛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등 한국어를 선보였다.

글=민경원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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