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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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812년에 일어난 미영전쟁은 14년 12월에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종전되었다. 그러나 「벨기에」에서 서명된 그「뉴스」가 미국에 도착하는데 배로 2개월이 걸렸다. 이때문에 1815년 1월에 「뉴올리언즈」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후에 7대대통령이 된「잭슨」장군이 대승하였다. 전쟁의 발단도 우스꽝스러웠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에 대항하기 위해서 영국은「프랑스」해상을 봉쇄하였다. 이 때문에 중립국이던 미국의 무역에 큰지장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하기 1개월전에 봉쇄를 중지했기때문에 전쟁의 명목은 없어졌다. 불행하게도 봉쇄중지의 「뉴스」가 늦게 미국에 도착했기때문에 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신속한 통신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통신에는 신속성만이 중요한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정확성과 비밀성도 보장되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마차를 이용한 우편배달제도가 생기기는 14세기초부터였다. 처음에는 편지겉봉을 초로 밀봉하였으나 나중에는 「핀」으로 간단하게 봉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리 엄중하게 봉을해도 몰래 뜯어보는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이며, 그것도 차츰 계획적이 되고 또 대규모화하여 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이나 다름없이 옛날에도 유명인사·학자·부호들의 사생활에 대한 일반의 호기심은 대단했다. 그래서 뇌물로 우변배달부들을 매수하여 배달하기에 앞서 살짝 뜯어보곤 하였다.
이런 악습이 뜸해지게된 것은, 특히 「프랑스」에서 1742년에 칙령으로 신서의 비밀을 침범한 사람에게 엄벌을 가하겠다고 포고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
몰래 뜯어본 다음에도 제대로 배달만 해준다면 그래도 고맙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송두리째 가로채 버리는 일이 많다.
몇해전에 미국에서 돌아오다 부친 소포 두개를 분실한 일이 있다. 그것을찾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지쳐서그만 포기해버린일이 있다.
언젠가는 또 어느시골의 배달부가 배달하기가 귀찮아서 우편물들을 태워버린 일이있다.
최근에 일어난 서울시내 4개우체국의 우편물 절취사건은 결국 현직 체신공무원이 주범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언제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음놓고 우편물을 보낼수 있겠는지 좀 한심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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