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일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시리즈」는 최근 20여년 동안 세계 각국 문단에 형성된 새로운 문화풍토를 개관하고 그 속에서 대표적 인간상을 추출함으로써 문학작품 속에 부각된 현대적 상황과 그 안에서 호흡하는 인간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기화된 것이다.
일본의 한 시인 고촌광태랑(1883∼1956)은 그 만년에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아름다움은 시대를 쫓아 그 성격이 바뀌어 가지만, 전시대의 이름다움이 축지는 않는다.』
즉 민족의 운명은 흥망의 연속이지만 그 흥망의 뒤에 남는 것은 그 민족이 지닌 아름다움 뿐이라는 것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가 전승과 기록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름다움을 높이는 민족은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높이는 민족이다』라고 덧붙였다.
얼핏 들으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식의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했을 뿐인 듯 하지만 일본의 전전 시인이 전후에 와서 읊조린 말이라는데서 특별한 여운을 지닌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1953년, 그러니까 항복으로부터 8년이 지나서 평화조약이 발효된 그 이듬해가 되며 이때 일본은 패전후의 허탈과 황폐, 혼미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더우기 이 노시인은 전쟁 중에 격조 높은 전쟁참가를 셌다가 패전과 더불어 전범으로 몰려 세상의 지탄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스스로를 참회, 동북의 한지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들쥐처럼 말년을 마친 것이다. 그 만년의 소리가 이 소리였으니 전전과 전후라는 그 엄청난 구획점이 일본예술에 어떻게 작용되었는가하는 것을 이 시인의 행적이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준다. 물론 태반의 일본작가, 시인들은 전전에서 전후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 앉았지만 고촌광태랑의 좌절이야말로 전전이라는 한시대의 종말이라 할 것이며, 바로 이 종말 위에 전후라는 새시대가 열리고 있다.

<「아름다운 슬픔」 일본예술의 단면>
이 고촌광태랑의 말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을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직후 천단강성도 『이제 나는 일본의 슬픔 이외에는 읊지 않겠다』고 비장한 감회를 술회한 일이 있다.
후에 그는『일본말로 슬픔이라는 말은 아름다움이라는 말로도 통하는 말인데, 그 무렵에는 슬픔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리하여 천단강성은 전전부터 써오던 『눈 고장』을 완결 짓고 명작 『산소리』와 같은 장편을 내고 있다. 이 작품은 1949년에서 1954년에 이르기까지 띄엄띄엄 발표되었는데 신오라는 한 노인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 가족 성원의 일상생활을 면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흔한 풍속소설만도 아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벌써 짐작된다. 『산소리』라는 이 제목은 제1장에서 주인공인 신오가 깊은 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대목에서 유래되고 있다. 그 소리는 귀가 탈이 나서 울린 소리라든지 헛들은 소리가 아니고 산의 소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소리인데, 그 소리를 듣고 이 노주인공 신오는 자기의 사기를 고지받은 듯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상야릇한 이 산소리는 이 작품의 주조저음으로 전편을 통해 들려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일본고래의 슬픔」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찮은 일상성과 혼연 일치가 되어 우러나오고 있다.

<전후사회 표현한 「사양」이란 작품>
그러나 전후일본문학에서 전후일본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대표적으로 내보인 작품은 태재치(1909∼1948)의 『사양』이라는 작품일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사양족」이라는 유행어를 낳게 할 이만큼 한 때의 일본사회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퇴락해가는 귀족 집안의 무력자들이다. 한 가족은 어머니와 자식인 남매뿐이다. 이들은 귀족이지만 돈이 없어 옷가지 등속을 팔아가면서 하루하루 겨우 연명해가고 있다. 어머니는 사회적 천치나 다름없고, 물정도 모를 뿐더러 물욕도 모른다. 귀족으로 전혀 천진하게만 살아와서, 세상과의 부딪침이 털끝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늙은 어린애>와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며 타인과 자기를 비교해 보는 안목조차 없다. 딸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여 친정에 돌아와 있는데, 그녀 나름으로 헌한 세상과 약간 부딪쳐 보아서 조금 만큼의 물정에는 틔어있다.
한편 「직치」라는 이름의 남동생은 문학청년이고 아편중독자인데, 어디로 가나 사람 대접을 못 받고 귀족대접만 받는데 질려있고 미칠 지경이다. 그 귀족대접이라는 것도 이미 외경이 아니라 적의와 경멸뿐이다. 자기는 자연스럽게 사회에 뒤섞이려고 하지만 어디서나 굳은 장벽에 부딪친다.
그는 「알콜」 중독자인 어떤 소설가와만 친할 뿐이다. 그 소설가는 이 세상에서 할만한 일은<혁명과 사랑>밖에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역시 무력자이다. 직치의 누나는 권태에 못 이겨 동생이 쫓아다니는 그 소설가를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의 애를 낳고싶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직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며 그의 누나는 소설가의 애를 밴다.
대강 이런 줄거리의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후 일본사회의 암울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재래형 일본지배층의 몰락상을 애조 섞은 분위기로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도 1948년에 어떤 20대 전쟁미망인과 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에 정사하고 만다.
전쟁직후의 일본풍속의 이모저모를 대표할 만한 작품은 이밖에도 많이 있지만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태재치의 성격적 무력증과 더불어 이 『사양』은 이 시대의 일본사회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낸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이 무렵에 출발한 작가로서 정상정은 삼도유기부 등이 있는데, 정상정은 역사물 특히 서역지방물을 즐겨 다루었고, 사살의 충실한 섭렵과 중후한 문체로서 정통적 산문가의 풍모를 보여주었으며, 삼국유기부는 재래형인 자연주의적 전통문학과 좌익의 정치주의문학 쌍방에 반발하면서 탄생한 협의의 전후문학개열에 들면서도 무전태순이나 추명인삼 퇴곡웅고 등 넓은 의미의 실존적 작가나 야간굉 굴전선위 등 신형의 사회적 작가와 대조되어 대강승평 등과 함께 신고전파로 불리고 있다.
야간굉 굴전선위 고견순 등 신사회파로 불린 작가들이 이 무렵의 일본좌파를 중심한 움직임을 대표하고 있지만 이렇다할 작품으로서의 성과는 별로 보잘 것이 없다. 차라리 추명인삼 처럼 좌파로부터의 전향의 소산인 『영원한 서장』같은 작품이. 이 무렵 일본사회의 한 국면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밖에 복영무언 중촌진일랑 가등주일 등 세칭 「마티네·포에티크」파, 세청 신서구파라는 것이 있고, 원등주작의 『일색인』같은 작품이 성격은 좀 다르지만 이 계열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무기력」에 반규「태양족」의 흉가>
전후의, 퇴락해가는 것에 대한 만가, 재래적 일본에 대한 슬픔이 주조음을 이루었던 『사양』류의 무력과 창백성에 대하여 격렬한 반항아로 등장한 작가가 석원신태랑(1932∼)이며 그의 『태양의 수절』이라는 작품이다.
태재치의 작풍이나 그 작가의 성격이「나이브」하고 감성적이며 또한 극히 염세적이고 비비꾀어진 병적인 것이라면, 석원신태랑의 작풍이나 성격은 적절하고 행동적이며 성성하고 적극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이 1955년에 발표되었다는 것부터가 전후시기를 탈피하여 부흥으로 들어서는 일본사회의 일반작인 풍조를 대표하였다고 보여진다.
이 작품의 출현은 그야말로 일본문학뿐 아니라 일본사회에 하나의 광풍을 몰아왔다.
『자기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은대로 행한다』고하는 주인공 이재의 생활은 태양족이라는 새유행어를 만들어내기에 족하였다. 그는 창백한 지성주의, 여성작인 심리주의 섬세한 문학지상주의의 풍토와 태재류의 피해자의식 위에 주저앉은 약자의 푸념에 결연히 반발하여 남성미를 부여하였다.
주인공 용재는 권투선수이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적수를 노려볼 수 있는 그「드릴」을 즐기는 투쟁적 성격이다. 무엇이든 두들겨 부숴야 성이차고 자질구레한 기성도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사귀는 영자라는 아가씨는 재래형의 처녀로서 용재를 독점하려고 본다. 용재는 일부러 그 애인 앞에서 햇별 싱싱한 바다를 배경으로 다른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며 그녀의 애를 태운다. 성이란 즐기는 것 이상일수가 없다. 제 형에게 영자를 단돈 5천원에 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결국 영자는 애를 밴다. 그러자 용재는 「소·윈도」너머의 멋있는 무늬의 「넥타이」하나쯤 갖고 싶다는 정도의 호기심으로 애를 낳기를 권고한다. 그러나 다른 권투수 하나가 제 마누라와 자식들과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나서 그 속물성에 몸서리를 치며, 당장 애를 떼라고 요구하고 나선다. 영자는 유산시키다가 죽어버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가서 그녀 사진의 비속한 웃음과 도전하는 듯한 눈길에 접하자 그 사진을 때려부수고 만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그러나 석원의 사고정지의 세계는 언뜻 보기에 남성적인 매력으로 차있고 한때 신선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얄팍하고 공소한 나팔로 떨어지기가 쉽다. 그것은 젊음의 구가일 뿐. 만년 젊음이 아닌 한, 반짝 타는 불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후 이 작가의 더듬어간 길이 이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그는 『처형의 방』 『북벽』 『완전한 유희』등으로 더욱 사고정지의 세계와 표현의 직절성을 부여했지만, 긴장감과 허탈감의 무의미한 왕복뿐이었고 드디어는 작가 자신이 일상속에 휘말려 들어서 요즈음 정계에도 손을 뻗쳐 참의원의원이 되고있다. 태재의 자살이 그의 필연의 「코스」였듯이 석원의 오늘도 필연의 길인 듯 보인다.
그러나<기존의 관념>이라든지 <어른들의 권위>라고 흔히 불리는 관념적인 적에 대한 관념적인 반발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한데 엉긴 재래적인 덩어리에서 삐죽삐죽 삐져나온 것은 감성적으로 잡아냈다는 점에 한때 그의 「이미지」를 신선하게 한 열쇠가 있었다.

<관념적 반항 아닌 감성적인 「광풍」>
석원의 뒤를 이어 나온 작가로 대강건삼랑(1935)가 있다. 그는 『사육』 『사자의 선물』등으로 초기에는 <어떤 감금 상태>의 소설화에 애썼고 「사르트르」류의 보존주의로 출발하였지만 신사회파에 속하는 야간굉의 영향 등으로 공동체원리와 그 저항, 개인과 사회 및 역사라는 진폭있는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품도 신무이래의 경기라고 물리는 최근의 일본사회를 그 나름으로 보여주고 있는바, 그것은 풍요한 사회에 부풀어오르게 마련인 일상성에 휘말려 들어간 석원과는 달리, 그 일상성에서의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측 『일상생활의 모험』이라는 작품속에서는 일본을 탈출하여 원시적인 「아프리카」로 간 주인공과 그의 자살을 다루고있으며 『만년원년의 풋볼』이라는 작품에서는 명치유신과 전후라는 백년을 사이에 둔 일본사회를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데 「오벌랩」 시키자는 발상으로서 소위 백년에 걸쳐 일본민중 속을 흐르는 사상의 줄기라는 것을 더듬고 있다. 요컨대 대강은 풍요한 일본사회의 지겹고 타락된 속물성에서 헤어나려고 원시의 고장으로, 혹은 역사 속으로 갈팡질팡하면서, 전체상적 시력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단활동의 출발은 석원이나 대강보다 앞서있지만 최근의 일본사회를 다른 국면으로 보여 주고있는 문제작가로서 안부공방이있다. 이 작가는 독특한 주장과 개성 있는 작풍으로 최근 대표작가인바, 『모래의 여인』이라는 작품온 도시의 한 「샐러리맨」이 곤충채집하러 시골로 갔다가 사구 속에 잠겨버려서 헤어나려고 안간힘을 하는 괴이한 예기를 다루고 있으며 『타버린 지도』에서는 역시 도시 속의 한 기사가 원인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어 도시라는 괴물에 자취도 없이 삼켜졌다는 식의 얘기이다.

<도시화의 분류서 상실한 인간 다뤄>
이렇게 그는 작가 시선을 최근의 풍요한 일본, 전국이 송두리째 도시화해가는 일본에 두고있는데 그것은 풍요한 사회의 도시성과 그 속의 인간형을 정면으로 다루고있다는 점에서 가장 첨단을 걷고있다. 그는 문학의 농민적 성격과 한 국가단위의 성격은 「톨스토이」에서 끝났으며 「카프카」이후부터는 도시성 그 자체가 현대성이라는 식의 일종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들고 나오며 그러한 추상적인 상황설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모래의 여인』 『타버린 지도』등이 최근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현대세계라는 일반적 상황으로 포착, 그 속에서의 문제를 「드라이」 한 문체로 다루고 있다.
한편 삼도유기부는 『풍요의 바다』라는 사부작으로 되는 장대편으로 파멸종말의 너머에 재생하는 개체와 시대를 넘어선 불교적인 윤회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현대사회에의 「페시미스틱」하면서도 명석한 예술적 인식, 즉 미의 순교자라는 발상을 내걸고 있다.
결국 오늘이라는 시대의 일본과 그것을 담은 일본문학의 현주소는 대강의<폭넓은 공동체의식>, 안부의 <다분히 서구적 유대적 발상으로 보이는 현대의 도시화와 그 속 인간의 「보헤미언」의식>, 삼도의 <불교적 윤회의 세계로의 지향>으로 압축될 듯 하다. 문제가 문제니 만큼 많은 작품과 많은 작가가 사상되었으며, 이 글이 문학적 가치기준에 쫓지는 않았음을 밝히고 싶다. 【이호철(작가)】

<차례>
①미국
②독일
③프랑스
④영국
⑤공산권
⑥라틴·아메리카
⑦아프로아메리카
⑧일본
⑨한국
⑩미내 이 「시리즈」는 매주 1회 게재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