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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임진강·한강 합수 지점, 천 년 전처럼 활짝 열려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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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06면

1 김영환 위원이 22년 전 북으로 가기 위해 안내원을 접선했던 ‘쌍묘’.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듯 잡초가 무성했다. 2 김영환 위원이 자신이 반잠수정을 탔던 갯벌을 가리키고 있다. 조용철 기자

전날 종일 비가 내려 걱정이 많았다. 탐방 일정에 애기봉 전망대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비가 오거나 흐리면 낭패가 될 것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3일 오전 화창하게 갰다.

정전 60년 千의 얼굴 DMZ 김영환이 돌아본 비무장지대

 애기봉은 ‘아기’와 관련됐겠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간 평양감사를 그리던 그의 애첩 ‘애기(愛妓)’가 이 봉우리에 올라 매일 북녘을 바라보다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됐다. ‘애기봉’이란 이름도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현지를 시찰하다 ‘애기의 한은 우리 천만 이산가족의 한과 같다’며 지어 준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바로 옆에 30m 높이 애기봉 등탑이 있다. 등탑엔 복잡한 남한의 이념 갈등이 얽혀 있다. 군은 54년부터 애기봉의 소나무로 성탄트리를 만들어 오다 71년 이 등탑을 설치해 성탄절마다 점등했다. 그러나 불은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점등은 2004년 남북 합의로 중단됐다 연평도 포격 뒤인 2010년 재개됐다. 하지만 이듬해 중단됐다 2012년 재개됐다. 2010, 2012년 점등 때는 찬반 논란이 거셌다. 진보진영 일각에선 ‘애기봉의 성탄 점등이 가장 평화적인 것을 가장해 가장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비난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북한이 지금 너무 망가져 성탄트리조차 위협이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런 체제를 최대한 보호하고 살려 두는 게 북한 주민에게 어떤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남북 관계 발전을 위해 너무 공격적이어선 안 되겠지만 성탄트리까지 시비를 걸거나 지나치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 관계는 특수하지만 동시에 보편성도 끊임없이 추구할 때 정상적으로 발전한다.
 전망대 동쪽 멀리론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合水) 지점이 보이고 가까이엔 ‘유도’라는 조그마한 섬이 보인다. 그곳엔 훈훈한 남북 관계가 담겨 있다. 96년 8월 경기도 북부에 퍼부은 집중호우 때 수소가 떠내려오다 섬으로 올라왔다. 몇 개월 뒤 겨울이 되자 동사(凍死)를 걱정한 우리 해병이 97년 1월 북측의 양해와 유엔사의 허가를 얻어 소를 구출했다.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지어 제주도로 보냈고 ‘통일 염원의 소’라는 이름의 암소와 짝을 맺어 줬다. 지금 그 부부 소의 후손이 40마리나 된단다. 그 소를 구할 때 해병대 장병, 그리고 국민은 먼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를 구한 것처럼 북한 주민들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소 구출에 협력했듯 남북 협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시선을 서쪽으로 돌리자 멀리 예성강 입구가 보인다. 고려시대 ‘벽란도’라 불리던 국제무역항이 있던 곳이다. 물살이 좀 빠르지만 고려 수도 개경에서 30리밖에 안 되고 수심이 깊어 세계를 향한 고려의 출입구가 됐던 곳이다. 고려 중기에는 송(宋)·왜(倭)뿐 아니라 아랍·동남아로부터도 상인들이 들락거렸다. 천년 전의 국제무역항 벽란도, 갈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만감이 교차했다. 개방의 상징이었던 벽란도가 가장 폐쇄적 나라인 북한에 있다는 것, 대외무역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이 그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 모두 역사의 아이러니다.

 전망대를 나와 강화도로 가는 차량에서 나와 동행한 안성규 에디터가 밀입북 장소를 찾아보자고 은근히 강권한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날 이후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은 강화도 건평리. 다시 찾는다는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여전히 주민을 탄압하는 북한, 지금도 종북 노선을 걷는 과거의 동지들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래도 장소는 쉽게 찾을 것이라 여겼다. 주소와 갯벌 모두 알고 있으니 주변 야산과 출입로만 보면 척하니 찾겠다 싶었다. 게다가 그곳으로 이선실·황인오·김낙중 같은 ‘거물 간첩’들이 들락거렸다는 정부 발표도 있어 주민들이 잘 알겠거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형은 확 바뀌었다. 잠수정을 탔던 갯벌의 허리는 해안도로로 잘려 한쪽은 논이 됐다. 접선 장소였던 산자락엔 작은 포장도로가 생겼고 산길은 흔적도 없어졌다. 주민들도 제대로 몰랐다.
 먼저 찾아야 할 곳은 1차 접선 장소. 바닷가 야산의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있던 곳이었다. 북한공작원이나 국정원 모두 ‘쌍묘’라고 불렀던 지점이다. 주민들에게 거듭거듭 묻고 차로 한 시간 반쯤 헤매다 마침내 포기할 무렵 나이 지긋한 지역 주민 덕에 마지막 후보지를 찾았다. 이미 훑어본 길의 옆으로 솟아 있는 풀 언덕이다. 길은 없고 허리까지 웃자란 잡초를 30m쯤 헤쳐 나가니 머릿속 어디선가 그때 기억이 확 솟구친다. 맞다. 오랫동안 방치된 무덤들은 길게 자란 잡초로 덮였지만 분명히 거기였다. 내가 그때 어둠 속에서 여기 있었지, 감회가 새롭다.

 91년 5월 16일. 나는 오후 6시쯤 산 부근에 도착했다. 접선 시간은 밤 12시. 숲으로 숨어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한밤중, 무덤으로 나와 몸을 웅크렸다.
 12시20분쯤. 별안간 “짝짝짝짝.” 손뼉소리가 났다. 호송원 2명이 온 것이다. 나도 손뼉을 쳤다.
 그러자 “영삼이 형님 아니십니까”라고 묻는다. 나도 약속대로 “아, 영철이 아닌가”라고 답한다.
 악수를 나눴다. 그들이 준 적외선 안경을 쓰니 눈이 밝아졌다. 갯벌로 향했다. 반잠수복을 입고 걷는데 다리가 푹푹 빠진다. 1㎞쯤 걸었다 싶었는데 이번에 가 보니 250m 정도다. 아무도 알아차리거나 막지 않았다. 뻘이 끝나는 곳에 반잠수정과 4명의 호송원이 있었다. 나는 당시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살아왔기 때문에 특별히 겁나진 않았지만 내심 긴장은 됐다. 호송원들은 들킬 걱정을 하지 않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하며 웃었다.

 반잠수정의 객실로 올라갔다. 너무 작아 쪼그려야 했다. 그런 자세로 4시간을 항해해 새벽에 황해도 해주에 도착했다. 부두엔 노동당 사회문화부(당시 대남공작사업부) 부부장과 부과장이 나와 있었다. 그들로서는 ‘대형 남쪽 인사’가 온 것이다. 그들과 아침식사를 한 뒤 헬기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이어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나 이틀간 6시간 대화를 나눴다. 김일성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북한 이유는 소련과 동유럽 붕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미증유의 사태에서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했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만들었으니 새 사상도 만들 것 같았다. 그러나 얘기를 나눌수록 그는 30년대의 생각에 꽉 막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너무나 큰 실망이었다. 북한에서의 2주(週)가 오히려 북한으로부터 마음을 돌리고 근본적인 노선 전환을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리라는 걸 쌍묘 옆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후 22년이 흘렀다. 김일성은 내게 ‘이미 조선은 이밥에 고깃국 먹는 수준을 실현했다’고 장담했지만 몇 년 뒤 수백만 주민이 굶어 죽는 사태를 겪었다. 이어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여러 남북 회담이 있었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 회담, 6자회담 등 많은 접촉이 있었다. 북한은 줄곧 변화를 거부했다.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핵무기를 통해 체제 안전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듯하다.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는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나는 서해를 생각했다. 서울에서 서해로 나가는 한강 하구는 지금 아무도 다니지 못하는 금단의 강이 됐다. 그곳을 넘어 서해로 나가면 북방한계선(NLL)이 있다. 그곳도 먹구름이 잔뜩 깔려 있다. 천 년 전 번영과 개방의 터였던 한강 하구와 서해는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 됐다. 그래선 안 된다. 북핵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지만 해결되기 전이라도 벽란도 인근, 한강과 임진강 하구, 서해를 남북이 공동 개발하는 것은 어떨까.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이후 국민의 안보의식이 높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남북 교류·협력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데까지 가면 안 된다. NLL 수호도 중요하지만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내고 근본적인 변화와 발전으로 유도하는 게 몇 배 더 중요하다. 북한은 지난 몇 년간 중국과의 교역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북한이 중국에만 경제를 개방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바다로 이끌어 내야 한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개성이 인접한 바로 서해가 그 터전이 돼야 한다.



김영환 1980년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강철서신’의 저자. 주사파의 원조다. 남한 혁명을 위한 지하조직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91년 김일성과 면담한 뒤 생각을 바꿔 주사파와 결별했다. 지금은 북한 인권과 민주화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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