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 일본 전철 밟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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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미국 경제가 일본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낙관론자들은 미국 경제가 일본처럼 12년간이나 침체기에 빠져들도록 방치될 리 없다는 주장을 폈다. 여기는 미국이다.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FRB)가 "디플레이션 예방: 1990년대 일본경제의 교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미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의 채권 시장 분석가 마이크 크로허티는 "어디서나 FRB의 디플레이션 보고서에 관한 얘기뿐이다. 일본과 현재 상황을 비교하는 이들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비교를 끌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일본은 거품경기를 거쳤고 미국도 거품경기를 거쳤다. 일본은행들은 낮은 금리에도 불구하고 기업대출을 꺼리고 있고, 미국 또한 대출을 꺼리는 은행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FRB 보고서가 일본의 경제 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플레이션이 미국에서도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디플레이션은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비싼 돈을 지불하고 구매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기업들은 점점 더 판매 수익이 줄고, 은행들은 이들에 대한 대출을 꺼리게 된다.

이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로 인해 일본은 거품 경기가 한창이던 지난 1989년 12월 이후 주가가 70% 가량 하락했다.

'디플레이션 시나리오'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핌코(PIMCO)의 경제 전문가인 폴 맥컬리는 그린스펀 FRB 의장에게 디플레이션 사태를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률을 높이라고 요구했다. (핌코는 총 자산 2천5백억 달러의 미국 최대 채권 펀드회사이기 때문에 맥컬리의 관점은 옳고 그름과는 상관 없이 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화요일,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에서 "일본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그 가능성이 농후하진 않아도 지난 몇 달 전 같지만은 않은 등 디플레이션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도 연방 이자율을 유지하는 등 '탄약을 아끼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점"이라고 썼다.

'아직도 인정 못해'
FRB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모건 스탠리의 리차드 버너 미국경제 분석팀장은 근심에 싸인 투자자들의 전화공세를 받고 있다. 그는 이들의 우려가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고 생각한다. 버너는 "FRB 보고서는 과장되게 해석됐다.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버너는 약 일년 반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가 FRB의 최근 당면 과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FRB가 매달 내놓고 있는 수많은 연구 보고서중 하나일 뿐이다.

(FRB는 이 보고서 이외에도 지난 6월 사이 '경로 추적 알고리즘을 이용한 거시 경제 모델내 수치 발견법: 자본수령 모형의 예', '노동 소득 분배가 인플레이션을 가져오는가?'등 흥미로운 보고서들을 발간했다.)

노던 트러스트사의 폴 카스리엘 미국 경제 분석팀장은 오히려 투자자들이 우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플레이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FRB가 계속해서 통화량을 늘리고 있는 가운데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며 상품가격이 계속 치솟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네이피어 인베스트먼트 어드바이서의 론 네이피어 사장은 여전히 일본의 교훈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1980년대 살로몬 브라더스사의 아시아 경제 분석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네이피어는 미국 증권 시장이 일본 만큼이나 심각한 거품 경기에 빠져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많은 이들이 콧방귀를 뀌던 1990년대 후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이후 그 여파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다.

네이피어는 "경제학자들은 하나같이 이는 정상적인 경기 변동이라며 이제야 말로 미국 경제가 회복기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한다"라며 "하지만 일본에서도 역시 이런 말이 나왔었다. 미국은 남다른 독자적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어 곧 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네이피어는 어느 부문에서 발생하던지 간에 거품 경기가 오랜 여파를 남길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일본 역시 애초부터 디플레이션이 문제됐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단지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가 번영을 맞이하면서 지나친 성장 드라이브 정책에 의해 일본 은행들이 어쩔수 없이 낮은 이자율로 투자 자본을 빌려준 것이 화근이었다.(어디서 많이 듣던 상황이지 않은가?) 한때 잘나가던 기업들이 구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들은 얼마간 내수 시장에서 버텨줬지만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과거보다 소비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간혹 가다 일본 경제는 마침내 침체의 질곡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여 정치가들은 승리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하락의 늪에 빠져들고 말뿐이었다.

지난 100년 사이 있었던 또 다른 거대한 거품 투자 현상이었던 920년대 미국 증시 상황은 또 어떠했는가? 역시 거품 경기의 여파 속에 정부가 나서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로 물가 하락 시기를 겪었다.

최소한 20세기의 경우 "거품 경기에서 막 빠져나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디플레이션을 겪는다."

NEW YORK (CNN/Money) / 오병주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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