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98> 97년 외환위기의 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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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태국에서 시작한 위기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로 전염됐다. 불과 넉 달 후인 8월 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신세가 됐다. 국가부도 사태가 동남아에서 번지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총리는 경제정책 결정 라인에서 빠져 있었다. 총리 간섭 없이 경제부총리의 지휘 아래 경제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제부처와 비(非)경제부처 간 의견이 다른 부분을 조정해주는 역할만 했다. 경제장관회의에 총리가 참석하는 일도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아보려면 청와대 담당 수석이나 경제부처 장관을 따로 불러 묻는 수밖에 없었다.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총리님,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걱정을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경제는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튼튼합니다.”

 그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펀더멘털 얘기만 했다. 안심이 안 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 끝에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전임 경제부총리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현 사태에 대해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라’는 취지였다. 남덕우·신현확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와 만찬을 연이어 마련했다. 나도 합석했다.

1997년 12월 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오른쪽)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임 부총리 왼쪽에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앉아 있다. [중앙포토]

 1997년 말로 갈수록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1월 들어 경제관료들 입에서 나온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가 신문에 보도됐다.

 11월 15일 만찬 행사 자리에서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를 만났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이 됩니다.”

 “저도 걱정이 됩니다. 부총재를 보낼 테니 한번 설명을 들어봐 주십시오.”

 “아, 그러면 내일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11월 16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약속대로 한은 부총재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불러 만났다. 그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외환보유액이 300억 달러가 넘긴 하지만 대부분이 묶여 있는 돈이고 가용액은 30억 달러 수준이라는 설명이었다.

 ‘큰일이 났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청와대에 급히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11월 18일 화요일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었다. 내가 들은 얘기를 했다. 김 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어요. 보고를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보고를 받았는지에 대해 김 대통령은 말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경제부총리를 경질하는 개각이 단행됐다. 그리고 11월 21일 재정경제원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도 한국 경제에 상처로 남아 있는 IMF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참담했다. 그리고 총리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하지만 총리로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5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대가로 IMF는 까다로운 이행 조건을 제시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이행 조건 양해각서에 각 정당의 합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요구까지 했다.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15대 대통령선거를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치르는 일도 중요했다. 그것 말고도 챙겨야 할 사안은 많았다.

 1997년 12월 15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담이 개막됐다.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시기였다. 나는 김 대통령을 대신해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15일 오전 공식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 회담장 전실(前室)에서 13개국 정상이 모여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외환위기가 아시아에 짙게 드리운 시기였다.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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