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 골프 스타일' … CEO들 경영 벤치마킹 모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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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 선수가 지난 달 27일 US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티샷을 준비하고 있다. [사우 샘프턴 AP=뉴시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8개월간 스폰서 없는 설움 이겨내

아웃도어 업체인 블랙야크의 강태선(64) 회장은 1일 미 프로골프투어(LPGA) 박인비(25) 선수의 US오픈 우승을 지켜보면서 ‘청계천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1973년 50만원을 들고 서울 청계로 단칸방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강 회장은 “이제껏 세상에 없던 상품을 만들겠다는 당시의 창업 의지와 ‘아무리 어려워도 우직하게 내 길을 가겠다’는 박 선수의 각오가 오버랩됐다”고 말했다. 중국·유럽 등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이 회사는 2020년 세계 1위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세계 여자골프 역사를 새롭게 쓴 박인비 선수의 3연승은 기업인에게도 ‘울림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골프를 즐기든, 그러지 않든 ‘박인비식 돌부처 스타일’이 위기극복 경영과 일맥상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저성장 기조를 돌파하는 벤치마킹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강 회장은 “대회 기간 내내 그의 샷은 흔들림이 없더라. 반짝 우승하고 사라지는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며 “이 같은 꾸준함을 기업인도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꼽은 박인비식 골프의 경영 키워드는 꾸준함과 위기관리·승부욕·집중력·긍정 마인드였다.

 28개월간 스폰서 없는 설움 이겨내

 화천기계 조규승(68) 사장은 박 선수의 경기를 기업 경영에 빗대서 분석했다. 요컨대 성공한 경영은 탄탄한 기본기와 위기관리·섬세함이 조화를 이루는데, 박 선수의 플레이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는 얘기다. 특히 그는 박 선수의 감정 기복이 없는 플레이를 높이 평가했다. 지난 1997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조 사장은 “기업은 위기 때 표정관리가 중요한데 박 선수는 20대의 나이임에도 대회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더라”며 “나이를 떠나서 리더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조언했다.

 특히 박 선수는 올 5월 KB국민은행과 계약하기 전까지 28개월간 메인 스폰서가 없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상품 가치가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2011년엔 한 중소기업에 스폰서와 관련해 사기를 당하는 아픈 기억도 있었다. 일본 업체로부터 후원 제의가 있었지만 박 선수의 의지는 분명했다. “한국 기업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호식품 김영식(62) 회장은 “박 선수에게서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봤다”고 말했다. 광고모델로 등장해 유명해진 그는 “스폰서가 없이 운동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것은 그 순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지만 스스로 버텨내야 할 시련”이라며 “박 선수는 끈질긴 승부욕으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최근의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승부욕과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휠라글로벌의 윤윤수(68) 회장은 박 선수의 연승 행진이 누구보다 반갑다. 이 회사는 지난해부터 박 선수에게 의류를 지원하고 있다. 윤 회장은 “1일 오후 박 선수에게서 감사 전화를 받았는데 (뛰어난 활약을 해)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박 선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나다”며 “기업도 소비자에 집중하면 롱런할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진리를 박 선수에게 새로 배우고 있다”고 흐뭇해했다.

“기업, 운동보다 더 오래 인내해야”

 반도체 검사장비 업체인 파이컴(현 솔브레인이엔지) 창업자인 이억기(59) 전 대표는 “골프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는 마음가짐”이라며 “그래서 박 선수는 경영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표는 “박 선수가 평소 ‘퍼트가 다소 불안할 때는 이번 아니면 다음 홀, 그래도 아니면 그 다음 하면서 위안을 삼는다’고 하더라. 기업인은 이런 긍정과 소신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주성엔지니어링의 황철주(54) 대표는 보다 냉정한 평가를 했다. 스포츠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공정한 경쟁의 장이지만 기업의 세계는 훨씬 냉혹하다는 지적이다. 황 대표는 “박 선수의 3연승은 끊임없는 인내와 공정 경쟁이 결합된 성취물”이라며 “기업인은 운동 선수보다 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하고 더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재·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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