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공 뿌리는 62세 김수룡 회장 '야구는 내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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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회장(왼쪽)이 22일 김용철 감독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3시 경기도 양주시 송추베이스볼파크. 사회인야구 송추 SB리그의 도이치은행그룹 대 한라프론티어스의 경기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경기 시작에 앞서 마운드에 선 도이치은행그룹팀의 투수는 모자를 벗고 깍듯이 인사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2세의 철완,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리그에 등록된 250여 개팀 선수 중 유일한 60대. 이 경기는 그가 도이치은행그룹 야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마지막 경기였다. 30일 그는 도이치은행그룹 회장에서 물러난다.

 경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동료 선수들이 그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회사에서는 부하 직원이지만 그라운드에서는 평등하게 땀을 흘리는 동료들이다. 감사패를 받아든 그는 “각본에 없던 건데…”라며 감동했다. 선발투수이자 3번타자로 나선 김 회장은 마운드에서는 2이닝 3실점, 타석에서는 3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팀은 19-11로 대승했다.

김수룡

 김 회장의 야구 사랑은 각별하다. 경남 김해의 미군 공군기지 근처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글러브와 배트를 쥐었다. 부산상고(현 부산개성고) 입학 후 야구부에 들어가 고2 때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부모 반대로 6개월 만에 야구부에서 나왔다.

 야구와 다시 인연을 맺은 건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2005년, 모교에서 열린 친선경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김응용(한화 감독) 선배 등이 꼭 참석하라고 했다. 너무 오래돼 전혀 못 던질 줄 알았다. 그런데 재학생 포수가 ‘선배님 볼 끝이 살아있습니다’라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2007년에는 직접 사내 야구팀을 만들었다. 사비를 털어 동계훈련을 했고, 격려금도 전달했다. 부산상고 6년 후배인 김용철 전 롯데 감독대행도 사령탑으로 모셨다. 이듬해 도이치은행그룹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주최 전국사회인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

 야구팀은 사내 활력소가 됐다. 은행·증권사·자산운용사로 나눠져 소원했던 사원들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구심점이 됐다. 김 회장은 “8강까지 투수로 활약했다. 준결승과 결승에선 8타수 8안타를 쳤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고 했다.

 야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뜨겁다. 지난 시즌과 올 시즌까지 팀이 치른 18경기 중 16경기에 출전했다. 요즘도 캠코더로 자신의 투구 폼을 찍어 분석한다. 2008년 스피드건으로 찍은 최고 투구 속도가 시속 136㎞까지 나왔다. 커브와 슬라이더도 수준급이다. 한 직원은 “이런 열정이 있으니까 회장까지 하시는구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1978년부터 뉴욕 월가와 홍콩 등 국제금융계에서 일하며 ‘SR 킴’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3년에는 대통령 자문 외국인투자유치위원장을 역임했고 2005년 도이치은행그룹 회장에 오르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야구는 투구 하나하나가 심리 싸움이다. 변수가 많다. 항상 다음 시나리오를 생각한다. 야구를 통해 익힌 상황 분석 능력이 경영에서도 실수를 줄이고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체력과 정신력, 리더십도 야구를 통해 키워갔다. 그는 “육체적·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낄 때는 고교 시절 사흘 연속 등판해 완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의 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고 덧붙였다.

 퇴임 후 행보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야구를 계속 할 것 같으냐고 묻자 김 회장은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계속 해야죠”라며 웃었다.

글·사진=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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