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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과 창조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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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문명사에서 현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여럿 있지만 ‘플라스틱 시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사용하는 도구의 주재료는 과거 석기와 청동기·철기를 거쳐 지금은 플라스틱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스틱은 일상 잡화에서부터 첨단 전자산업의 소재까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며 현대 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다.

 플라스틱 발명은 엉뚱하게도 당구공에서 비롯됐다. 당구공은 원래 상아로 만들었는데 19세기 중반 들어 피아노 건반 등으로 상아 수요가 늘어난 반면 코끼리 수는 점차 감소했다. 그러자 당구공을 만들던 회사가 상아를 대체하는 재질을 찾는 현상광고를 냈다. 이를 보고 미국인 존 하이엇이 새 재질을 찾아 실험하던 중 최초의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를 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플라스틱 도입의 역사도 자못 드라마틱하다.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은 해방 후 화장품 사업을 시작해 각고의 노력 끝에 수입품에 손색없는 크림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용기의 뚜껑이었다. 쉽게 깨지는 바람에 소비자의 불만이 쏟아졌다. 그때 시장에서 경쟁하던 미제 화장품의 뚜껑은 던져도 깨지지 않고 밟아도 부서지지 않았다. 플라스틱이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의 특명에 따라 플라스틱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는 플라스틱에 대해 아는 전문가나 자료가 전무했다. 어렵사리 외국에서 구한 합성수지에 관한 책을 밤 새워 연구한 끝에 마침내 플라스틱 제조기술을 알아내게 된다. 현재 세계 4위의 생산능력과 수출품목 중 5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1930년대 들어 비닐봉지·음료수병의 재료가 되는 폴리에틸렌이 개발되고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탄생하면서 플라스틱은 인류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출발이 늦었지만 이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첨단 플라스틱 분야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액정디스플레이(LCD)는 글로벌 시장 규모가 연 800억 달러나 되는데 우리 기업이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사실상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 미래 먹거리를 찾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창조경제 하면 많은 이들이 으레 정보통신기술(ICT)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경제가 특정 산업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플라스틱의 발명이나 우리나라 플라스틱 산업의 첫걸음에서 보듯 창의력과 열정으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미래 유망산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분야든 창조경제요, 창조산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창조경제는 또한 기존의 틀을 깰 때 시작된다. 물고기가 헤엄을 멈추면 물살에 휩쓸려 가듯 지금 당장 수익이 난다 해서 안주하면 그 자리마저 지킬 수 없다. 락희화학이 플라스틱 개발을 시작할 때는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한국전쟁 와중이었고 화장품 사업으로 일군 모든 재산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기업가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사업을 일으킬 때 보람 있고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여기며 과감히 투자했다고 한다.

 최근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들어선 이유는 많겠지만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창의력과 열정을 발휘해 도전할 만한 미래 유망산업은 무궁무진하다. 플라스틱 산업만 하더라도 고기능성 소재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양전지 등에서 전도성 플라스틱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인공장기 등 의학 분야에서의 활용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정부에서 창조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그 최대한의 역할은 이를 위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일 뿐이다. 창조경제의 성공 열쇠는 결국 기업이 쥐고 있다. 앞서 말한 플라스틱 산업을 비롯해 철강·자동차·조선·반도체 등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주력 산업은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우리 기업들이 지금의 사업에 만족하지 말고 창조경제의 길에 적극 나서길 기대한다.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이라 했다. 최선을 다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새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