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 포커스] 러시아 관객들 "레바논 얘기가 대체 어디 있느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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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영화제에 ‘레바논 감정’을 출품한 정영헌 감독(왼쪽)이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옆은 영화평론가 키릴 라즈로고프

“이 영화는 모두 알레고리입니다. 아트하우스 영화를 액면대로 이해하려 해선 안 됩니다.”

영화사의 젊은 러시아 전문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알레고리가 되지요?” 러시아 관객들이 놀라 물었다. “우리 아트하우스 영화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지요.”

영화 상영 후 국립극장 ‘키노악토라’의 로비는 영화를 본 관객들의 거친 감정으로 뒤숭숭했다. 당혹감, 분노, 비애, 격분, 연민, 경멸, 환희, 공포.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무더운 여름날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냉혹한 이 영화로 수군거렸다. 35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정영헌 감독의 영화 ‘레바논 감정’이 주인공이다.

“러시아 관객이 제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궁금했습니다. 제 영화들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좋았습니다. 당연히 한국 관객보다 러시아 관객들은 제 영화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겠지요. 한국 관객들은 웃고, 울고 하던데 러시아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대중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정 감독의 말이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저명한 소련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솔라리스’(1972), ‘거울’(1974), ‘스토커’(1979) 등이 있다. 그의 영화는 정신적이며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고 롱 테이크 기법에 평범한 극적 구조가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다수 러시아 관객에게 ‘레바논 감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경력 40년인 한 중년 여성 영화 평론가는 “한국 영화를 내 분야가 아닌 것으로 취급한 지 오래입니다. 이런 자연주의와 잔혹한 장면이 왜 필요하죠? 잔혹성은 물잔 속에도 보여줄 수 있지만 뼈 부러지는 소리로는 아니에요. 그렇게 터무니없는 자연주의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25세의 영화 기자 안톤의 견해는 다르다. “흥미롭고 심오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심 내용을 따라가기 어렵고 혼란스럽다는 느낌만 남지만. 그래도 인간이 혼돈에 대항해 벌이는 희망 없는 무의식적인 싸움을 보았습니다. 객석의 탄식 섞인 한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러시아 관객들은 이런 잔혹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혹은 영화 제목 ‘레바논 감정’이다. 관객 중에는 장면이 느닷없이 레바논으로 옮겨지길 기대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한국과 레바논을 폭력과 잔인함으로 연결해 보려고도 했다.

정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제목이 무슨 뜻인지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왜 하필 레바논인가? 레바논은 제 영화 주제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주 강렬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뭐라 부를지 모르는 경우도 있지요. 영화 촬영 얼마 전 한국 여류시인 최정례씨의 시를 읽었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의 제목을 따와 영화 제목을 짓기로 했지요. ‘레바논 감정’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의미하며 분노·악의·절망도 아닙니다. 서로 얽혀 조화를 만들어내는 모든 감정의 총체입니다. 그런 감정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

상영회에 온 관객은 기성세대가 대부분이었다. “러시아 관객은 이런 영화를 받아들여 이해할 준비가 안 돼 있고 그만큼 성숙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주제를 초월해 있는 도덕성입니다.” 문화 사업가인 나데즈다 고르바치의 평이다.

젊은 관객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재미있지만 두 번 볼 것 같지는 않아요.” 러시아국립영화학교(VGIK) 졸업생 빅토리아(21)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잔인한 장면들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영화로 기억되는데요. 하지만 잔인한 장면들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고 감독이 말한 조화로의 전환도 볼 수 없었습니다”라는 평도 덧붙였다.

엘레나 프로시나 기자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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