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 "남녀 명시 결혼보호법 위헌"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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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국 연방대법원이 결혼의 정의를 이성 간의 결합으로 한정,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연방법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미국 내 동성애자의 인권 수준 향상뿐 아니라 사회 인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26일(현지시간)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규정한 결혼보호법(DOMA)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했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재판관 5명이 위헌 의견을 냈고, 4명은 합헌 의견을 냈다.

 판결문을 작성한 앤서니 케네디 판사는 “DOMA는 연방 정부가 준수해야 하는 기본적인 정당한 법 절차와 동등한 보호의 원칙을 위배했다”며 “각 주가 정하는 결혼법에 따라 (동성 결혼을 통해) 존엄과 인간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을 폄하할 만한 합법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이 연방법은 무효”라고 설명했다. 케네디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 내리자 법정에 있던 동성애자들이 무지개색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다.

 그동안 DOMA만으로는 각 주에서 법으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연방법상의 금지 규정 때문에 동성 커플은 이성 부부가 누리는 증여세 감면 등 1000여 개의 혜택에서 제외됐다. 현재 미국 12개 주에서는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으며 30개 주는 동성결혼을 금지한다. 나머지 주는 동성 커플에게 제한된 권리만 인정하는 등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뉴욕주에 사는 83세 여성 에디스 윈저가 자신의 부인 테아 스파이어가 사망한 뒤 연방정부가 상속세 36만3000달러를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고 소송을 낸 것이 발단이 됐다. 이들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뉴욕주에서 44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고 스파이어는 숨지면서 모든 재산을 윈저에게 남겼다. 하지만 연방정부는 이들을 결혼한 부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윈저에게 상속세 감면 혜택을 주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난해 6월 연방항소법원이 DOMA를 위법으로 판단하면서 대법원이 최종 판단을 한 것이다.

 동성결혼 합법화는 지난해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하면서 뜨거운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로이터통신은 이 판결이 미국의 사회·문화·정치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이지만, 종교계와 보수층 등은 동성 간의 결혼을 반대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성결혼 합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비등했다고 AP는 전했다. 뉴욕 타임스는 DOMA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보여온 오바마 행정부가 이제 동성 부부에게 보장할 사회적 혜택 정책을 마련하는 더 큰 과제를 안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외신들은 ▶동성결혼 합법화 ▶소수 인종 선거권 보장 투표권리법 ▶적극적 우대조치 등을 미국민의 정체성과도 연관될 3대 현안으로 집중 조명해 왔다. 미국 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양분하는 첨예한 사안들을 쥐고 있던 대법원이 하계 휴정기가 시작되기 전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리면서 큰 숙제를 털어버린 셈이다.

앞서 대법원은 25일 인권 차별 전력이 있는 주는 선거법을 개정할 때 연방정부 혹은 연방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한 투표권리법(Voting Act)의 핵심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40년 전 만들어진 법이므로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24일에는 소수 인종 등 후발주자들의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한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해 재심리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법원 판결이 보수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지만,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으로 일단 형식적 균형을 맞춘 셈이 됐다.

전영선·유지혜 기자

◆결혼보호법(DOMA:The Defense of Marriage Act)=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성에 의한 법적인 결합, 배우자를 이성 커플로만 규정한 미국의 법률. 1993년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 법은 위헌이라는 하와이주 법원의 판결에 반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96년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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