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연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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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같은 말도 어디에 「액선트」를 두느냐에 따라 크게 뜻이 달라진다. 문장을 잘쓴다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말의 「뉘앙스」를 가려쓸 줄 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몇년 전에 미국의 어느 지방신문에 시의회의원의 절반이 수뢰했다는 폭로기사가 실렸다.시의회에서 즉각적으로 그 기사의 정정을 요구한 것은 물론이다. 그랬더니 그다음날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표제가 바뀌어 나왔다.
『시의회의원의 반수가 뇌물을 받지 않았다.』
두기사가 다 같은 얘기지만 청자에게 안겨주는 인상은 엄청나게 다르다. 그래서 시의회측에서도 아무 말을 못했다한다. 반수가 수뢰했다는것만은 진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같은 말도 이처럼 쓰기에 따라서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고, 또 아기자기한 대화를 가능하게도 만든다. 원래가 말이란 자기표현뿐만이 아니라 남과의 대화를 위해 생긴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요새 우리네 주변에서는 너무나도 폭력적이며, 과격한 표현들만이 유행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주변의 너무도 병적인 심적풍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가령 국세청 앞에 크게 나붙은 표어를 보면 『나와 너의 근대화는 나와 너의 납세에서』라고 되어있다. 아무리 표어라고는 하지만 「당신」이라는 친밀감이 나는 말을 제쳐놓고「너」라는 반말을 쓴 것은 뭔가 강압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처럼 표어가 많은 나라도 드물것이다. 표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표어란 그 성격상 과격한 표현을 빌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표어의 폭력적이며 과격한 표현에 사람들의 의식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폭력적인 행동에까지도 어느덧 마비되어 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납세란 국민의 의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쁨을 안겨주는 의무라야할것이다. 그런 기쁨을 폭력적인 표어가 앗아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돌이킬수 없을 만큼 언어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모양이다. 요새 설악산조난사고에 대한 보도를 보면 「공격전」이니 「공격조」니 하는 말들이 예사로 튀어나온다.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작업에 전투용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뭣인가를 더럽히고 있는것만 같다.
그래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지들 않다. 모든게 「카키」색으로 뒤덮여 버린것 같은 황량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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