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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구전략, 그리 겁낼 것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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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영욱 논설위원·경제전문기자

경제학자와 관련된 조크 중 하나가 ‘외팔이 경제학자’다. 트루먼 전 대통령이 “경제학자는 늘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다’고 한다.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외팔이 경제학자’는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경제학자에게 주어진 모호한 상황과 선택의 고뇌를 살짝 비튼 조크인 것이다. 똑같은 얘기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들었다. 그를 의장으로 발탁한 부시 전 대통령은 “(벤은) 경제학자 아니랄까 봐 입만 열면 ‘한편, 다른 한편’이라 한다”며 “손이 세 개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대한 감각이 대단히 뛰어나다”며 “부드러운 몸가짐 이면에는 1930년대의 실수를 피하려는 강렬한 결의가 있다”고 극찬했다.

 부시 말처럼 버냉키는 세계 최고의 대공황 전문가다. 그는 금융가속기(financial accelerator)론을 주창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경기침체가 1930년대 초 대공황이 된 건 은행 위기가 가속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1929년 증시 대폭락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대공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 정부가 방치하면서 1933년 은행 위기가 터졌고, 결국 대공황이 됐다. 버냉키가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은행 위기를 막으려 했던 이유다. 사무실에 침대를 두고 퇴근도 하지 않으면서 내놓은 게 양적완화와 제로(zero)금리였다.

 대공황에서 배운 건 또 있다. 대공황 이후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자 미 정부는 1937년 출구전략을 내놓았다. 이듬해 더블딥(이중 불황)으로 심화된 건 그래서였다. 버냉키가 금융위기 이후 출구전략을 입 밖에도 내지 않은 이유다. 그는 부양책 일변도였다. 돈을 풀어 미 국채와 주택담보부증권(MBS)을 매입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세 차례나 폈다. 2008년 1차, 2010년 2차, 그리고 지난해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게 3차 양적완화다.

 제로금리 정책도 지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시행기간을 계속 늘렸다. 2008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얼마 동안만’이라고 했다가 이후 2013년 중반, 내년 말, 내후년 중반까지로 연장했다. 당연히 반론도 거셌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 좀비은행만 양산한다, 자산거품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속히 출구전략을 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버냉키에겐 마이동풍이었다. 오히려 “주택시장과 고용시장이 회복될 때까지 무기한 실행하겠다”고 버텼다. 시간은 버냉키의 편이었다. 그가 옳았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가 나아질 듯하다가도 다시 고꾸라져서다. 유럽연합(EU)은 더블딥에 빠졌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던 때문도 있다. “역시 버냉키”라는 찬사가 나오는 까닭이다.

 이런 버냉키가 어제 출구전략 일정을 밝혔다. 올해 말부터 자산매입(양적완화) 규모를 줄일 수 있으며, 내년 중반 중단할 수도 있다고 했다. 물론 “미국 경제가 기대만큼 좋아진다면”이란 조건부였다. 경제가 좋아지지 않으면 줄이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로금리도 계속하기로 했다. 기준금리를 올리는 건 “먼 미래의 일”이라고 못 박았다. 요컨대 경제가 좋아져도 금리는 올리지 않고, 양적완화 규모만 줄이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는 출구전략이 아니다. 매입한 채권을 매각하고,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게 출구전략 아닌가. 게다가 시간표를 제시했으니 그동안 악재로 작용했던 불확실성도 줄었다. 최소한 기습적으로 금리를 올렸던 1994년의 그린스펀 쇼크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세계 금융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아무리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초(超)장기로 생각하는 금융시장이라 해도 지나친 반응이다. 세계경제가 위기를 맞는다거나 외환위기에 빠질 신흥국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는 모양인데, 얼토당토않다. 버냉키의 행적과 철학을 안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사주경계를 게을리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외환시장을 점검하고, 부실을 챙기는 건 그것대로 의미 있다. 다만 과잉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 우리 수출에는 유리한 순기능도 있다. 정작 걱정되는 건 유럽과 일본이다. 유럽은 여전히 더블딥이고, 일본은 엔저로 돌아설 게 분명해서다.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도 이것이다. 버냉키의 퇴임이란 변수는 있지만 미국 출구전략은 그리 겁낼 것 없지 싶다.

김영욱 논설위원·경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