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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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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논설위원

칠순이 내일모레인 C씨의 개인택시를 탄 것은 우연이었다. 사십 년 넘게 서울·경기에서 택시를 몰았다는 그는 운전대 옆에 낡은 사진 한 장을 붙여놓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신진자동차(주)에서 출시한 코로나택시와 그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늠름한 남자, 바로 그 사람이 C씨다. 차 값은 120만원, 대기업 사원 월급(2만원 안팎)의 60배였다고 했다. 택시 토크의 출발은 유쾌했다.

 “사진 시절, 정말 끝내줬죠.”

 C씨는 화려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한 달 수입 3만~4만원. 운 좋은 날, 서울에서 안양까지 가는 부자손님이 걸리면 단번에 2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택시는 은전(恩典)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1967년 개인택시 면허제도가 생겼을 때 일정 계급 이상의 군·경 퇴직자, 국가유공자 등에게 면허가 주어졌다. 자신처럼 장군의 차를 운전한 덕에 면허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택시운전의 프라이드는 셌다. 유쾌한 토크는 여기까지였다. 잘나갔던 택시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C씨의 기억을 토대로 택시의 실패사를 더듬어봤다. 그것은 겉으로는 멀쩡하나 한 치 앞도 못 내다본 청맹과니 정책의 연속극이다.

 첫 번째 청맹과니 정책은 1978~80년 정치적 혼란기에 나온다. 원칙적으로 보면 개인택시 면허는 매매·상속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당대에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양도·양수를 양성화하고 상속까지 허용한다. 고위층들은 ‘달리는 로또’를 정치력 확대에 활용했다. 무원칙의 선심정책으로 택시의 장래는 꼬이기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 택시 수를 조정하기 힘든 틀이 들어선 것이다. 전두환 정부 말기, 교통부는 매매·상속이 미래의 짐이 될지 모른다고 예측한다. 매매금지법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당장 문제가 되지 않는 데다 선거를 앞둔 노태우 후보에게 불리한 사안이라는 집권 민정당의 반대에 직면한다.

 다음의 청맹과니 정책은 지방자치 출범기에 벌어진다. 1995년에 뽑힌 첫 민선 단체장들은 개인택시를 마구 늘려준다. 아직은 택시가 부족해 시민이 불편을 겪는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자가용 수는 1000만 대를 향해 가파르게 늘고 있었다. 대도시에서는 지하철이 쫙 깔리기 직전이었다. 교통 전문가들이 과잉공급이라는 경고 사인을 보냈지만 시장·도지사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실제로 지방자치 이후 지금까지 5만 대나 늘었다.

 새 밀레니엄 개막기에 청맹과니 정책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놓치고 만다. 택시의 연간 수송실적은 2000년 50억 명을 분수령으로 줄어든다. 최근에는 30억 명대로 주저앉았다. 새 택시 정책의 필요성이 숫자로 명명백백 드러났는데도 어처구니없이 택시의 질주는 계속됐다.

 2013년 한국사회는 뒤늦게 신(新)택시정책을 고민하고 있다. 국무회의에서 새 택시법이 통과됐다. 핵심은 두 가지다. 일부 국고를 들여 5만 대의 택시를 없애겠다, 요금을 올려 고급교통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당연히 나랏돈을 쓰고 물가를 올리는 데 저항감이 크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청맹과니가 되면 장래 세대의 부담은 더 커질 게 분명하다.

 미래연구자의 눈으로 볼 때 택시 실패사(史)는 좋은 연구재료다. 연구자마다 다르지만 미래예측 방법의 틀은 대개 네 단계로 정리된다. 조짐 찾기- 추세 읽기- 좋은 미래 짜기- 미래로 진전하기. 삼십 년 동안 택시정책은 정반대로 갔다. 마이카·지하철 시대가 곧 닥치는데도 징조를 알아채지 못했다. 수송실적이 빨간 숫자로 바뀌는 추세를 읽지 못했다. 바람직한 장래상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발걸음은 무원칙·선심정책이라는 과거로만 향했다.

 공공의료원, 쓰레기매립장, 송전시설 등을 둘러싼 새로운 갈등이 시작됐다. 세대·지역·이념이 얽힌 난제들이다. 이들에게 택시의 실패사는 살아 있는 경고다. 눈은 멀쩡하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되지 말자.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