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선언이 결정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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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본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12월1일에는 「재팬·애드버타이즈」지에, 동 15일에는 조선신문에 실려졌다.
동경유학의 한국인학생들은 이를 독립운동의 시기적계기로 이용하기로 하고 이해 12월에 본국으로 들어와 국내지사들과 일본에서 거사할것에 합의를 본후 19년 2월8일에 유학생 600여명이 동경 YMCA회관에 모여 송단백등 11명의 대표자명으로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다. 이것이 2·8선언이다.
2·8선언은 국내운동에 지대한 충격을 주게되어 거사를 발족케되었던것이니 2·8선언은 실로 3·1운동촉발의 결정타가 되었던것이다.
2·8선언에 참가하였던 동경 유학생들은 많이 국내로 들어와 국내운동에 합세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해외로부터 특사들이 들어옴으로써 국내운동의 여론이 조장되고 해외에서의 계획의 진행과 평화회의대표파견등 해외정세가 알려진 국내에서는 2·8선언으로 크게 충격을 받게되어 최남선 박희도 아승훈 현상태 함태영등의 주동으로 천도교, 기독교, 박희도의 학생세력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의 중심세력이 된것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등 조직과 지반을 가진 단체들이었다. 합방후 모든 조직과 단체들은 일제의 강압으로 깨어져 없어졌으나 오직 종교와 교육기관만은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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