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책을 남기고 먼저 간 남편, 책으로 다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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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남편의 서가
신순옥 지음, 북바이북
274쪽, 1만3500원

지난주 지리산의 한 능선을 오르다 푹 파인 구덩이를 봤다. 끊어질 듯 가녀리게 이어지던 길 위라 갑작스러웠다. 누군가 참호를 파놓은 듯, 깊고 넓은 구덩이가 생긴 까닭은 그만큼 크고 웅장한 나무가 뿌리째 뽑힌 탓이었다.

 천재지변 때문이겠거니 유심히 들여다 봤다. 그런데 오랜 시간 나무를 품었던 땅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나무의 굵은 뿌리는 뽑혀 나와 구멍을 냈고, 잔뿌리는 뚝뚝 끊어진 채 산발이 돼 땅을 헝클어 놨다. 그 모양새가 사나웠다. 땅은 찢겨 있었다.

 자연에조차 헤어짐은 아프다. 하물며 과거를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에겐 어떠랴. 연인과의 이별만 해도 함께 한 지난날이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운데, 오랜 시간 살을 비비며 살아온 배우자와 사별한다면.

 “함께 살아온 세월 동안 당신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존재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당신이라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이 막막함과 생경함이 두렵고 서글프다. 더 이상 당신이랄 수 없는 사람에게 당신의 진정성을 묻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내게 당신이란 존재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중략) 당신은 그리움이기도 하고, 헛된 삶이기도 하다.”(112쪽)

 책은 이름대로 아내가 남편의 서가에 꽂힌 책을 하나씩 읽으며 쓴 독서 에세이다. 그의 남편은 출판평론가였다. 가정주부였던 아내는 2년 전 뇌종양으로 남편을 상실했다. 집안을 꽉 채운 서가를 정리하다 철퍼덕 주저앉아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베레나 카스트의 『애도』였다. 책은 그에게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그것을 충분히 슬퍼할 만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준다. 감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됐던 만큼 슬퍼해야 한다고.

 저자는 남편의 책을 통해 애도를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떠난 남편을 읽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상실한 두 아이를 읽고, 주변을 읽는다. 그리고 자신을 읽는다.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고백하는 일기를 즐겨 써 온 저자는 그렇게 애도기를 쓴다. “집안에 널린 유품에는 이제 더 이상 당신다운 기품은 없다. 당신은 집안 곳곳에 배인 당신의 기운을 모조리 거둬갔다”며 D H 로렌스의 『국화 향기』를 읽다 감정을 토해내기도 한다.

 “대리석처럼 창백한 죽음 앞에서 남은 자는 막막하고 참담할 뿐”이라지만 책엔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아빠 힘내세요’란 노래조차 부르기가 거북스러워진 두 아이와 함께 저자는 석 달 넘게 걸려 『김성동 천자문』을 완독한다. 아이들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불러보게 하기 위해 편지 쓰기도 주문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곳곳에 담겼다.

 “부모가 어린 자녀의 교육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을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말처럼 공감 가는 구절이 많다. 책을 읽고 나면 남편과 사별한 아내의 ‘애도기’, 책을 좋아한 네 가족의 ‘가족사’, 남편이 남긴 장서가 밥벌이가 됐다고 말하는 엄마의 ‘육아서’를 읽은 것 같은 여운이 남는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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