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깎은 불량 세탁기, 삼성을 바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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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삼성전자가 1990년대 만든 불량 세탁기와 미국 가전매장서 홀대 받은 TV. 이들 제품은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 삼성전자]

1993년 6월 초,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던 이건희(71) 삼성전자 회장에게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전달된다. 비서실에서 보낸 이 테이프에는 세탁기 생산라인 근로자들이 결함이 있는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아내 본체에 붙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불량 세탁기 조립 사건’으로 불리는 이 장면이 사내 방송에 보도되면서 파장이 일자 해외 출장길의 이 회장에게 보고된 것이다. 이 회장은 그해 2월 미국 전자제품 양판점 ‘베스트바이’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은 터였다. 삼성 TV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돼 있는 것을 목격한 뒤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2등 정신을 버려라”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기내에서 테이프를 본 이 회장은 삼성전자 사장단과 핵심 간부를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93년 6월 7일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한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며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종합화학의 중간쯤 되는 증상”이라고 진단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품질 혁신은 속도가 더뎠다. 94년 삼성전자의 휴대전화기 부문은 불량률이 11.8%에 달했다. 95년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기 소비자로부터 불량품에 대한 항의가 잇따랐다. 이 회장은 시중에 판매된 휴대전화 15만 대를 전량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3월 9일 수거된 휴대전화는 삼성전자 구미공장 운동장에 던져졌다. 2000여 명의 임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앞에서 직원 10여 명이 해머를 들고 단말기들을 산산조각 낸 뒤 불태웠다. 당시 가격으로도 500억원에 달했던 제품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이후 삼성 휴대전화는 ‘튼튼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0년대 들어 세계시장 1위로 올라섰다.

 이처럼 삼성 신경영의 도화선이 된 세탁기와 TV, 질 경영의 상징이 된 불에 탄 휴대전화기 등이 한자리에 모인다. 삼성전자는 7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수원 ‘삼성 디지털 시티’에서 ‘삼성 이노베이션 포럼’을 개최한다. 포럼 첫날 7일이 프랑크푸르트 선언 20주년 기념일이다.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이경태 상무는 “불량품을 양산하던 시절의 참담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상물과 당시 제품을 전시해 임직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품질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설명했다.

 포럼에는 세계 1등의 주역들도 함께 전시된다. 소비자가전(CE) 부문은 ‘숨어 있는 1인치’를 찾아준 ‘명품 플러스원 TV’, TV시장 세계 1위 도약의 주역 ‘보르도TV’, 취향에 맞는 콘텐트를 알아서 추천하는 ‘스마트TV’ 등을 전시한다. 정보기술·모바일(IM) 부문은 국내 최초 휴대전화인 ‘SH-100’부터 세계시장 1위로 올라선 스마트폰까지 혁신 과정을 시대별로 전시한다. 부품(DS) 부문은 스마트폰용 최신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차세대 시스템반도체를 전시한다. 포럼은 27일부터 일반 고객 에도 공개된다. 참관하려면 10일부터 포럼 사이트(2013samsungforum.com)에서 신청하면 된다.

박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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