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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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을은 하루 하루 깊어간다. 요즘의 서울기온은 최저16도. 불과 열흘사이에 10도나 떨어졌다.
골목길에서 포도광주리를 이고가는 아낙네들이 자주 눈에띈다. 여름의 과일도 이제 끝물인가보다. 근래엔 포도주를 담그는것이 서민적인 행사처럼 되었다. 포도항아리에 화학주를 질퍽 끼얹고, 한달을 묵혀두면 벌써「포도주」가 되는, 그런 술이지만 아뭏든 술을 담그는 마음들은 그럴수없이 흐뭇하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좋은술을 마신기분으로 모두들 심취의 경지에 잠긴다.
노래하는 봄(Spring Spring)
생각하는 가을(Autumn Thinking)
수필가「조지·기싱」의 재담이다.
가을이 우리에게 생각하는 여유를 주는것은 「시간에의 깨우침」이다. 중국의 격언에 『남의집 처녀의 혼사옷 지어주는 노처녀』라는 말이있다. 혹시나 그런 심경에 견줄수 있는것인지 모르겠다.
가을이 되면 문득 시간은 허망하게 흘러가는듯한 느낌에 빠지는 것이다. 한낱 귀뚜라미가 울어도 잠이 멀어질수도 있다.
그러나 가을은 우리에게 촉각과 시각과 청각을 활짝 열어주는 계절이다. 소슬한 바람, 조낙의 풍경,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어딘지 마음의문을 열어주는 것 같다. 마음의 한쪽이 훤히트여오는것 같다.
그것은 신선한 의욕이며, 깊은 성찰이며, 또한 푸짐한 공복감일수도 있다. 공연히 책을 뒤척이고, 공연히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되며, 공연히 무엇인가 시도하려든다. 생활인의 새로운 도전이며, 전의이기도 하다.
현실을 현실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비극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임어당의 도식은 그런뜻에서 흥미있다. 현실에서 꿈을 빼내면 「동물적」이라고 말했다. 현실에 꿈만을 보태면 「이상적」이며, 이것은 심통을 준다고했다. 현실에 꿈과 「유머」를 합친것. 임어당은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무릎을친다.
가을의 교훈은 한숨도, 시름도, 허망한꿈도 아니다. 여름의 그 지루한 무더위를 훌훌 벗어버리고, 힘있게 일어나는 현실과 꿈과 「유머」의 합계, 그것이 가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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